이곳에서는 1975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의봉4년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을 통해 연못 주변 건물지가 문무왕 19년(679)에 지은 동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안압지라는 명칭은 1982년 당시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에 의해 “안압지는 월지”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후 안압지에서 나온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등에 새겨진 명문이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오는 동궁 소속 관청 가운데 ‘세택’(洗宅), ‘월지전’(月池典), ‘월지악전’(月池嶽典), ‘용왕전’(龍王典) 등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월지악전’(月池嶽典)은 조경을 담당한 관청인데, 소속된 관리 중 수주(水主, 둑과 연못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추정)를 뒀다는 기록으로 미뤄 이곳에서 연못을 관리했고 연못 이름이 월지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에 따라 1963년 사적 18호로 지정됐던 안압지를 포함한 신라왕궁 별궁터 ‘경주 임해전지’는 2011년 문헌기록과 출토유물, 발굴조사 내용 등의 재검토를 통해 ‘동궁과 월지’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3만3000점 신라유물 쏟아진 월지
동궁과 월지에 대한 첫 발굴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이뤄졌다.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부는 경주종합개발계획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 일환으로 경주의 여러 유적과 시의 외관을 정비하면서, 안압지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1974년 11월 준설공사가 시작됐다.
준설 작업 이전 월지는 가끔씩 낚시를 하는 이들이 찾는 넓은 연못에 불과했다. 그러나 준설작업이 시작된 뒤 이곳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발견됐다. 양수기로 연못의 물을 빼낸 다음 굴삭기로 진흙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다량의 유물이 섞여 나왔고 월지 호안석축의 일부가 드러났다. 공사는 즉시 중단됐고 이듬해인 1975년 3월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 주도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2년 여의 발굴조사 결과 전체 면적이 1만5658㎡(4738평)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그 안에 독립된 3개의 섬이 발견됐다. 연못 가장자리와 섬 외곽에 석재를 쌓아 만든 호안석축과 물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입수구·출수구 시설도 확인됐다. 못의 서쪽과 남쪽에서는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31곳의 건물터도 모습을 드러냈다.
출토된 유물은 3만3000여 점에 달했다. 이 가운데 1만5000여 점이 완전한 형태로 세상 밖에 나왔다. 이처럼 많은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연못 바닥 진흙 덕분이었다. 진흙은 마치 타임캡슐처럼 1200여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유물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가 토해냈다.
특히 1975년 4월에는 월지의 중도와 소도 사이에서 뒤집힌 모습의 나무로 된 배가 발견돼 화제가 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배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발굴조사 이후 1980년 9월까지는 유적의 정비·복원 사업이 진행됐다. 발굴 당시 출토된 건물 부재를 기초로 해서 3동의 건물을 복원했고, 나머지 건물 터의 기둥자리에도 화강암을 다듬은 초석을 배치하는 등 오늘날 볼 수 있는 동궁과 월지 유적의 모습을 갖췄다.
동궁과 월지 입구에 들어서면 연못 서편으로 복원된 건물 3동이 있다. 사실 복원 당시 신라 건축에 관한 자료·정보 등이 부족해 당대 건축물 형태로 완벽하게 복원한 것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출토된 부재를 기초로 해 복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유물 일부는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발굴 당시 화제를 모았던 목선도 월지관에 전시돼 있다.
월지와 동궁, 그 조성의 의미
문무왕 재위 시절 지어진 동궁과 월지는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연회장이자 태자의 공간이었다. ‘삼국사기’에는 674년(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연못이 바로 월지다. 또 679년(문무왕 19년) 안압지에 동궁을 지었다고 한다.
동궁을 지은 679년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뒤였지만, 월지를 조성한 674년은 아직 나당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다. 이 1년 동안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듬해 신라의 당에 대한 항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것으로 미뤄보면 하루하루가 급박한 형세를 이루고 전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문무왕은 왜 하필 이 시기 월지를 조성한 것일까. 그 의문은 674년 이전인 고구려 멸망을 즈음해 ‘왕권 강화’에 골몰하던 문무왕의 명으로 인공 연못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나당 전쟁 중이던 674년 완성됐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생긴다. 5년 뒤 조성된 동궁 또한 월지 건설 단계에서부터 함께 지어질 것으로 계획됐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문무왕에게 ‘왕권 강화’는 숙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숙명은 아버지 김춘추(무열왕)의 즉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비담의 난 이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춘추·김유신 연합세력에 의해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이는 당시 신라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고, 성골 출신인 기존 왕과는 달리 진골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무열왕은 자신의 즉위를 둘러싸고 야기된 진골귀족들의 불만을 회유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야만 했다.
무열왕이 백제를 멸한 이듬해인 661년 사망한 이후 즉위한 문무왕 또한 아버지 대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 안으로는 왕권을 계승·발전시켜야 했고, 밖으로는 고구려와 당에 대한 어떤 입장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게 당면 과제였다.
문무왕은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외교적·군사적으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668년 고구려를 멸하며 삼국 간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676년엔 백제·고구려 평정을 위해 일시적 동맹을 맺었던 당의 세력도 축출했다. 또 자신의 세력 기반인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권력의 외연을 넓혀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무왕은 왕실 권위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월지와 동궁을 조성한 것이다. 특히 문무왕에게 있어서 동궁을 짓는 것은 왕위계승을 위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신라 역사상 태자로 책봉돼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무열왕은 즉위 2년째 법민(문무왕)을 태자로 책봉했다. 문무왕도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한다.
태자 책봉은 왕위계승 문제로 빚어질지 모를 우려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컸다. 왕이 갖춰야 할 자질과 능력을 미리 함양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태자궁인 동궁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신라의 동궁은 태자의 거처뿐만 아니라 태자의 교육기관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한편에선 문헌 속 임해전에서 펼쳐진 많은 횟수의 주연(酒宴)을 예로 들며 태자 교육기관 내에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이 위치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동궁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은 엇갈린다. 월지 서편 건물지와 동편 영역을 포함한 곳을 동궁으로 보기도 하고, 월지의 동편을 동궁, 월지 서편을 월지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국립경주박물관 남측을 동궁으로 보는 견해가 기존에 있었고, 최근엔 월지 서편이 동궁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렇듯 연구자마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월지 주변에서 확인되는 동궁 관련 유물과 문헌 기록 등으로 볼 때 월지 주변에 동궁이 있었던 것은 큰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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