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부 이주(李周), 증조부 이윤흥(李允興), 조부는 이철동(李哲仝) 그리고 부친은 이계간(李季榦)과 모친 영천이씨(永川李氏) 사이에서 봉황대 아래 흥륜촌 북쪽에서 태어났다. 위로 이승안(李承顔)·이승민(李承閔) 두 형이 있고, 경북 청도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1479~1551)의 문인이다.
스승 김대유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조카이고,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되거나 삭파된 26인의 사림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의 사상은 오롯이 관란공에게 전해진다.
1558년 44세 늦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0년 건원릉참봉, 1562년 사옹원제조, 1564년 상의원제조, 1572년 상서원직장, 1580년 종부시전첨, 1585년 사도시직장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고, 명성을 드러내는 데 뜻을 두지 않고 효행에 힘썼다.
‘관란(觀瀾)’ 호는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주변 문천의 맑은 물과 보문보 축조 역시 관련이 많으며, 문호사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름지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말년에 경산 자인 신관리 동쪽 금학산 아래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별업을 마련해 집을 짓고 초어와(樵漁窩), 또 삼회당(三會堂) 그리고 시냇가에 흙으로 대를 쌓고는 맹구대(盟鷗臺)라 이름하였으니, ‘관란’은 물과 의미가 더욱 깊다.
덕봉(德峯) 이진택(李鎭宅,1738~1805)은 구충당(求忠堂) 이의립(李義立,1621~1694)의 행장을 지었는데, “곽란공의 현손(玄孫) 가운데 구충당 이의립은 1621년 5월 18일에 경주부 남쪽 전읍리(錢邑里)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병이 들자 어른 못지않게 정성껏 간호하였고, 하루는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작지(斫指)] 피를 드리는 효성을 보였으며, 돌아가시고 무덤 곁에서 삼년 동안 떠나지 않았다.”라고 그의 효행을 칭송하였으니 그 뜻의 굳셈을 알 수가 있다. 효성이 아니었다면 어찌 충성이 임금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으며 성공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그의 효행은 선대 관란공의 영향이 지대하다.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경주부 동쪽 효문동에 집을 짓고 당호를 ‘구충당’이라 하였다.
『동경잡기』에 “이승증은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과 효성을 극진히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당시 도적 팔룡(八龍)의 무리들이 각 고을마다 들끓어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는데, 이승증이 시묘살이하는 곳을 지나며 그곳을 가리키면서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충효동]이니 함부로 날뛰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며 마침내 졸개들을 모아 피해 갔다. … 누차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고,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고, 정문은 부의 동쪽 첨성대 북쪽에 있다. 행적이 ????삼강속록(三綱續錄)????에 구비되어 있다.”라고 기록한다.
두곡(杜谷) 이습(李熠,1508~1583)은 관란공과 종제관계로 1555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공연리(孔燕里)에 집을 짓고 스스로 ‘자락(自樂)’이라 하였다. 오직 경전 연구에 힘쓰며 날마다 종제 관란 이승증과 함께 강론을 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천륜으로 맺어진 지기(知己)라고 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우리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해 왔으니 삼가 이를 실추시키지 말라. 장기나 바둑, 술 마시는 일은 맹자께서 불효라 하셨으니 더욱 유념해야 한다.”라고 경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8세에 의병을 일으켰고, 그해 5월 28일에 대구사림에게 ‘통대구사림문’격문을 ‘자인진사 이승증’ 이름으로 보내 경상도 지역의 초기 의병활동을 주도하였으나, 1599년 10월 12일 자인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묘는 금학산 동북쪽인 용성 외촌 명계리에 있고, 사후 1647년에 자인현 선비들과 자인현감 손회종 등이 관란사를 건립하였으나 훗날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활산 남용만이 「묘지명」, 치암 남경희가 「정려비명」, 성재 허전이 『관란집 발문』, 화계 류의건은 문집을 읽고 나서 『題後』, 청천 신유한(1681~1752)은 『관란이선생정효각기』를 지었고, 정효각 건립에 이경관(李景觀)·이덕관(李德觀)·이세윤(李世胤)·이세중(李世重) 후손 등이 관여하였다. 다음 기회에 정효각 기문을 풀이해 게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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