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웬걸 오늘은 운동하는 소리가 안 들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여보 어딨어?” 하며 기웃대다 불 꺼진 주방에서 검은 형체 하나를 발견했다. 생크림 케이크를 퍼먹고(!) 있던 와이프였다. 운동복을 입은 채 말이다. 반갑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해서 “괜찮아 여보?” 조심스레 물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 하지만 전혀 걱정이 안 된다. 크림 묻은 입은 활짝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안 해도 상관없고. 내 눈에 여전히 이쁘고 날씬한(이쯤 되면 최면이다) 와이프한테 “맥주라도 꺼내올까?” 물었더니 속이 느끼하다며 칼칼한 막국수가 나오는 족발을 시키잔다.
사람 사는 건 집집마다 비슷하지 싶다. 평소 치밀하게 식단 조절을 하다가도 늦은 밤 라면 냄비에 물을 끓이고, 공부할 게 산더미인데 평소 안 보던 드라마가 그렇게 재미나고, 교양 있게 클래식을 듣는다더니 기분 좋게 흥얼거리는 건 죄다 트로트다. 이런 작은 일탈을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고 한다. 직역하자면 ‘죄책감이 드는 즐거움’ 정도인데 많은 사람한테서 흔하게 경험된다. 엄격히 식단을 관리하다가도 하루 날 잡아서 먹고 싶은 거 왕창 먹는 것도 같은 경우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다. 즐거운데 왜 죄책감을 동반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와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건 먹지 말자.” “이것만큼은 꼭 하자.” 마음속에 선을 긋고는 그 선을 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현실은 평면적이지 않다. 입체적이라서 유혹도 많고 변수도 많다. 그러니 예측 못한 일이 언제든지 발생한다. 문제는 규칙 한번 어겼을 뿐인데 이미 회복이 어려운 실패자가 되어있다. 게임에 한참 빠져있는 4살짜리 꼬마에게 ‘fail’이 무슨 뜻인 줄 아냐고 물었더니 활짝 웃으며 “한 판 더!”하고 답했다는데, 철이 든 어른들은 그것도 모르나 보다.
설탕이 잔뜩 든 화려한 음식이 “이래도 안 먹을 거야?” 하며 유혹할 때가 있다. 그런 위기 상황에 재깍 유혹당해 버리는 나와는 달리, 와이프는 “안 되는데, 이거 먹으면 살찌는데” 하는 기도(!)를 꼭 드린다. 다음날 보면 역시 기도대로 이루어졌다! 죄책감은 ‘기도빨’이 세기 때문이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몸이 반응하는 것은 사실이다. 오랜 세월 적응해 온 진화의 결과다.
자, 어차피 선을 넘었다면, 그전에 선 긋기 버릇을 멈출 수 없다면, 그래서 선을 넘을 때마다 자학하는 습관도 고치기 힘들다면, 차라리 선을 당당히 넘어버리는 건 어떨까! 가령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치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치자. 담배가 백해무익한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고생한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을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결론부터 말해 뇌가 이 ‘주문(또는 기도)’을 진짜라고 믿어버린다고 한다. 미국 국립약물남용연구소(NIDA)에서는 니코틴은 엔도르핀 분비를 증가시켜 일시적인 행복감이나 황홀감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면 뇌는 그 정당성에 화학적 보상까지 더해주는 식이랄까. 건강을 위해서는 절대 권장하진 못하지만, 마음에 긍정적인 선을 그으면 니코틴마저 행복 호르몬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인간은 언제나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만든 작은 의식과 보상으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정도로 영민하다. 다이어트 중 몰래 먹는 케이크 한 조각, 시험이 끝난 뒤 마시는 맥주 한 잔은 힘든 하루 끝에 허락되는 사치품 같은 생필품이다.
길티 플레저의 핵심은 단순하다. ‘죄책감’도 마음에서 나오고, ‘즐거움’도 그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즉 다이어트 중에 케이크 한 조각 먹었다고 인생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작은 일탈이 다시 시작할 힘이 되기도 한다. 절제와 욕망 사이를 늘 오락가락하는 우리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인생이다. 죄책감 한 스푼쯤 들어가도 괜찮다. 그 덕분에 행복이 두 스푼쯤 따라온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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