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이란 사전적 의미로 인간의 육체를 표현 매체로 삼아 사상·감정·감각·정서 등을 율동적으로 표출하는 예술 행위라고 한다.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추었던 춤을 무애무(無㝵舞)라 한다. 걸림이 없는 춤이라는 뜻의 무애무는 ‘무애’라는 말에서 가져왔다. 무애란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문구에서 비롯되었다. 일체의 무애인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원효의 무애무 기원은 『삼국유사』 <원효불기>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립국악원에서 편찬한 『국악사전』 에는 ‘걸림 없는 춤이라는 뜻으로 향약정재(鄕樂呈才)로 호리병 모양의 호로를 들고 추는 춤’이라 정의하고 있다.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고려 때부터 전하는 향악 정재의 하나’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향악은 삼국시대에서부터 내려오는 한국 고유의 음악으로 궁중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그리고 근·현대의 무애무
원효에서 비롯된 무애무는 고려 때부터 민간에서 궁중까지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때에는 혼자 추는 독무(獨舞)였으나, 고려 때에는 기녀가 등장하는 형태로 변형되어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이런 형태로 전승되었다.
고려시대 무애무와 관련된 자료는 이인로의 『파한집』과 일연의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고려 중기의 문인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무애무를 최초로 언급하였는데 일부를 인용해 본다.
‘옛날 원효 대성은 백정, 술장수 등과 어울렸다. 일찍이 목이 굽은 호리병을 매만지며 저잣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그것을 무애라 이름하였다. 그 뒤에 어떤 호사가가 호리병 위쪽에 쇠방울을 달고 아래쪽에 채식 비단을 늘어뜨리어 장식을 삼고는, 가볍게 두드리며 나아갔다 물러섰다 하는데, 모두 음절이 맞았다. 이에 경전의 게송을 따라 무애가라 하니 밭 가는 늙은이도 이를 모방하여 유희로 삼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춤인지 그림이 그려지는 구체적 표현이다.
조선시대에도 무애무의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악학궤범』을 비롯하여 1434년(세종 16년) 화암사에서 추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 권 64에 전한다. 일정 기간의 단절된 시기를 지나 1829년(순조 29년) 무애무가 다시 등장한다. 효명세자가 국한문 창사를 새로 지어 순조 40세 축하연에 연행한 기록이 『진찬의궤』에 남아있다.
『진찬의궤』에 전하는 무애무의 춤사위는 ‘호로를 잡고 북향하여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며 춤을 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02년 고종 때까지 전승된 기록을 『진연의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로 궁중에서 전승된 무애무는 부처님의 자비와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형태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창사(唱詞)가 변형되었다.
1915년 9월 매일신보에 광교조합 기생이 공연하는 무애무 공연 광고가 실렸고, 같은 해 10월에는 다동조합 기생의 무애무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는 1981년 5월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개최된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공연한 바 있다.
뮤지컬로 만난 원효
오늘날 서양음악과 춤의 도입에 따라 원효의 춤은 어떠한 형태로 변화하는지 뮤지컬과 오페라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먼저 2011년 MBC 창사 50주년 특별기획으로 뮤지컬 『원효』가 만들어졌다. 화려한 LED 조명과 현대적 감각의 무대연출, 빠른 템포의 전개로 이전과 다른 하이테크 뮤지컬을 표방했다. 제작비 50억원이 투입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선정이 되어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주요 도시에서 공연했다. K-POP에 이은 K-콘텐츠로 한류 문화를 선도한 작품으로 평가할 만큼 성공적 공연이었다.
뮤지컬 《쌍화별곡》은 2012년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해서 불교방송이 MBC와 공동 제작한 창작뮤지컬이다. 역사적 인물 원효와 의상을 통해 시대의 학문적 라이벌 관계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갈등 관계를 무대에 옮겼다. 전국 주요 도시는 물론 중국서도 호평받았다.
창작뮤지컬 《원효와 요석》은 2024년 원효의 탄생지 경산시립극단에서 무대에 올렸다. ‘승려 이전 인간이다’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지루하지 않게 대중에게 다가간 작품이다.
1991년 부산에서 뮤지컬 《원효대사》가 창작되어 대성공을 거둔 적 있다. 부산의 연출진과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으로 부산 최초라는 오페라의 상징성과 성공한 오페라의 의의까지 지니고 있다.
오페라로 만난 원효
음악적, 연극적, 문학적, 미술적 요소들이 들어있어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는 오페라에도 원효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1971년 김자경 오페라단에 의해 오페라 《원효대사》가 무대에 올려졌다. 가곡 「비목」과 「기다리는 마음」으로 친숙한 장일남 작곡가가 2년간 심혈을 기울여 인간 원효의 불교사상을 오페라화했다. 바리톤 김원경과 소프라노 김성애, 유충열이 각기 원효, 요석, 의상 역을 맡아 열연했다. 출연진들은 혼연일체 합심을 위해 해인사에서 합숙까지 해가며 열연했지만, 흥행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오페라의 저변이 약했음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1984년 12월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오페라 《원효》가 국립오페라단 제40회 오페라 정기 공연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작곡은 장일남, 지휘는 홍연택, 연출은 오현명이 맡았다.
1998년 9월에는 대구시립오페라단의 공연이 원효의 주무대였던 천년고도 경주에서 있었다. 특별히 불국사 경내 야외무대에서 펼쳐졌다. 불국사 대웅전과 자하문으로 연결되는 청운교, 백운교 앞에서 펼쳐져 한국 오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원효 춤의 재탄생과 재평가
7세기 원효의 시대에서 21세기까지 무려 1400년간 끊어지지 않고 원효는 춤과 노래는 질긴 생명력으로 이 땅에서 함께해 왔다. 전승되어 오는 과정에서 다소 변화의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무애무가 지닌 원효의 철학과 사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무애무도 현재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춤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오페라와 뮤지컬로 재해석되며 재탄생하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옛적에는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불교 대중화를 위한 포교의 방편으로, 우스꽝스러움으로 이목을 끌기 위한 민중 교화의 수단으로, 삼국 환란의 시대엔 치유의 춤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두 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장애를 끊기 위함이요, 세 번 발을 구르는 것은 삼계를 뛰어넘기 위함이네’
관휴 선사의 게송처럼 불가에서는 원효의 춤을 깨달음의 춤으로 보기도 한다. 천년 넘게 이어오는 일본 전통적 염불춤인 ‘오도리네부츠’도 원효의 무애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막춤으로 부르는 춤도 원효의 무애무로 보는 사람도 있다. 각설이타령도 마찬가지로 원효의 춤에서 유래를 찾고 있다. 각설이를 깨달을 각(覺), 말씀 설(說) 이치 리(理), 풀이하면 깨달음을 전하는 말로 이치를 준다는 뜻이다. 원효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원효의 춤은 흐르는 세월 속으로, 사람들 몸속으로 자연스레 흘러든 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걸림이 없고 거침없는 원효의 춤은 때로는 관광버스 안의 우리 엄마들의 막춤이 되기도 하고. 오일장 공터의 엿장수 가위소리 장단에 춤을 추는 각설이 춤이 되기도 한다. 오늘은 원효가 우리 동네 장날 품바로 올지도 모른다. 우리 몸에는 나도 모르게 원효의 춤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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