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이 도시의 시계를 잠시 세계의 초침과 맞춘 역사적 사건이었다. 천년 고도라는 유구한 상징 위에 국제 외교의 무대가 더해지며, 경주는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전 세계의 조명을 받았다. 국제적 인지도의 상승과 도시 인프라의 획기적인 정비, 숙박과 교통 체계의 현대화는 분명 우리 공동체가 일궈낸 값진 자산이다. 단기간에 얻기 힘든 이러한 물리적 성취는 경주가 세계적인 마이스(MICE)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화려한 축제의 막이 내린 지금, 우리는 비워진 무대 위로 본질적인 질문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 대형 국제행사가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빛나는 기억은 남았으되 도시를 지탱할 지속 가능한 구조는 남았는가. 행사는 끝났지만, 시민들의 일상은 질적으로 달라졌는가.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APEC은 단지 ‘잘 치러진 잔치’로 퇴색될 뿐 경주의 재탄생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는 행사 이후의 공백을 채울 경주만의 고유한 서사를 다시 고민할 때다.
그간 경주는 국민들에게 ‘한 번은 꼭 가야 할 도시’였으나, 역설적으로 ‘다시 머무는 도시’가 되는 데는 부침을 겪어왔다. 유적 중심의 단조로운 동선과 낮 시간에 편중된 소비, 특정 지역에만 몰리는 방문 패턴은 우리가 풀어야 할 오래된 숙제다. 관광객의 숫자는 늘었을지언정, 그들이 경주의 리듬에 깊숙이 스며들어 삶의 결을 공유하는 체류형 관광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화려한 이벤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이제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을 ‘일상의 매력’을 채워 넣어야 한다.
우리가 꿈꾸는 2026년의 경주는 더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반복되는 일상의 힘을 믿는 도시여야 한다. 국제회의 도시라는 위상을 일회성 소모품으로 쓰지 않고, 학술과 문화 교류가 정례적으로 이어지는 지적(知的)인 살롱의 도시로 변모시켜야 한다. 그 실마리는 거창한 시설 건립이 아니라 여행자가 경주의 삶에 스며들 수 있는 ‘일상 문화’의 회복에 있다. 지역주민과 여행자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 산책이나, 사찰과 서원이 주관하는 아침 명상 같은 소박하지만 단단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특히 경주의 밤은 여전히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야간 관광을 단순히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하는 공식에서 벗어나, 사유와 휴식, 정적(靜寂)이 오히려 경쟁력이 되는 역발상을 제안해 본다. 천년의 세월을 품은 도시라면, 가장 강력한 콘텐츠는 역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밤’의 평온함일지도 모른다. 소음이 사라진 거리에서 별빛과 고분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 그런 고귀한 경험이야말로 현대인들이 경주라는 도시를 다시 찾게 만드는 강력한 끌림이 될 것이다.
APEC이라는 큰 산을 넘은 경주가 이제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일상을 선택하고, 어떤 속도로 살아갈 것인가. 관광은 그 삶에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어 주민과 상생할 것인가. 2026년, 경주는 다시 한번 사건이 아닌 시간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세계가 주목했던 그 열기를 이제는 도심 곳곳의 실핏줄로 흘려보내야 할 때다. 경주의 품격은 행사의 규모가 아니라, 그곳을 흐르는 시간의 깊이에서 나온다. 그 깊이를 일상의 문화로 빚어내는 길, 그것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경주의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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