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은 무열왕이 재위 7년(660)에 백제를 멸한 뒤 이듬해 사망하면서 즉위했다. 이후 21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그 가운데 16년은 통일 전쟁의 기간이었다. 백제 유민과 거듭 싸워야 했고, 고구려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당나라의 야욕도 상대해야 했다.
문무왕에겐 이처럼 아버지 무열왕 사망 이후 왕권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가 하는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신라를 군사적으로 계속 괴롭혀왔던 고구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선택할 것이며, 향후 예상되는 당의 거센 압력을 이겨내며 옛 백제 지역을 영토화 할 것인가도 주요 당면 과제였다.
문무왕은 현실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이 외교·군사·정치적으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오랜 기간 치열하게 이어지던 삼국 간의 전쟁을 마무리 지었고, 백제·고구려 멸망을 위해 일시적 군사동맹을 맺었던 당나라 세력을 축출했다.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적절히 활용해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신문왕대에 전제 왕권이 확립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文)과 무(武), 두 글자 시호의 의미
이러한 업적은 문무왕이란 이름에서도 잘 드러난다. 문무왕의 생전 이름은 법민(法敏)이었다. 문무(文武)라는 이름은 그가 죽은 뒤에 얻은 시호(諡號)다.
시호엔 후세의 평가가 반영돼 있다. 특히 문(文)이나 무(武) 같은 시호는 나라를 새로 세우거나 그 기틀을 다진 사람에게 올리는데 둘 중 하나만 붙는 게 일반적이다. 문무왕의 아버지 무열왕의 시호에는 ‘무’가, 아들 신문왕의 시호엔 ‘문’이 쓰였다.
반면, 문무왕에게는 두 글자 모두를 붙였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이에 대해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통일과업 성공(武)과 함께 통일국가 수성(文)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후대의 평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봤다. 기존 틀을 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기틀을 문무왕이 마련했기에, 신라 통합 왕조는 이후 수백 년 동안 큰 분열을 겪지 않고 존속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엔 문무왕의 흔적이 즐비하다. 신라 국왕 가운데 가장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무열왕릉과 능비, 동궁과 월지,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 대왕암과 감은사, 이견대, 문무왕릉비와 능지탑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들을 개별 유적으로 이해하거나 스쳐지나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적들을 서로 연결 지어 깊이 들여다보면 이곳에 스민 문무왕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작은 나라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당의 세력을 막아내며 한반도 통일의 대업을 이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국민의 단결과 협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를 지켜내려는 ‘호국 의지’에서 시작됐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신라인이 강력한 호국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계기는 ‘불교’였다. 신라인에게 불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상이었다. 오늘날 많은 불교 연구자들이 신라 불교의 핵심 중 하나로 꼽는 것도 ‘호국불교’다.
경주시 보문동 낭산(狼山) 자락, 터만 남은 사천왕사는 불력을 통해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세워졌다. 사천왕사가 신라 호국불교의 대표적 사찰이자 삼국통일의 상징적 사찰로 불리는 이유다.
호국불교의 성지, 사천왕사지
사천왕사는 문무왕(재위기간 661~681)의 뜻에 따라 지어진 대표적 사찰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은 이뤘지만, 문무왕에게 한반도 지배를 노리던 당나라는 큰 골칫거리였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일으킨 나·당전쟁은 문무왕 통치기인 670년 신라가 지원하는 고구려 부흥군이 합세한 연합군이 압록강 너머 당군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당나라엔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외교사절로 가있었고, 당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볼모로 억류된 상태가 됐다. 마침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의상대사는 김인문을 만나 당나라의 대규모 신라 침공 계획을 전해 듣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다. 의상대사로부터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문무왕은 당나라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지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했고, 각간 김천존은 “근래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왔다고 하니 그를 불러 물어 보라”며 다소 황당한 책략을 제안했다.
명랑법사가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비법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는 주술적인 밀교(密敎) 의식이었다. 문무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명랑법사를 부르게 되는데, 그는 “낭산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긴박해져만 갔다. 당나라 군대가 서해로 쳐들어온다는 전갈이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왕은 명랑을 불러 일이 급하게 됐으니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고, 명랑은 여러 가지 색 비단으로 절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문무왕은 명랑의 말대로 낭산 자락에 비단으로 절을 짓고 오방신상을 만들어 세웠다.
드디어 당나라 장수 설방은 군사 50만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고 있었다. 명랑은 계획대로 문두루비법을 활용해 큰 바람과 거센 물결을 일으켜 적의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 이듬해인 671년에도 명랑의 문두루비법은 신라로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을 서해에 수장시켰고, 신라는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문무왕 19년(679)에 이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고 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사천왕사 건립 배경이다.
‘문두루비법을 쓰니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다소 과장이 있었겠지만 “사천왕사의 창건이 통일전쟁 직후, 당의 공격시점에 이뤄졌다는 것은 사천왕 신앙의 호국적 성격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2006년부터 만 7년 동안 사천왕사지에 대한 정밀학술발굴조사를 벌였던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불교에 따르면 사천왕이란 수미산 중턱 사방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신라에선 호국의 신으로 각광받았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사천왕사 창건의 의미에 대해 “불력을 이용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려 한 문무왕의 승부수”라고 요약했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자리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사천왕사는 경주의 동쪽 지역인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 야트막하게 솟은 낭산(해발 115m) 남쪽 자락에 있다.
낭산은 동네 뒷산 같지만 옛 신라인에게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13년 실성왕은 이곳에 하늘의 신령들이 내려와 노닌다고 해서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사천왕사지가 세워진 곳은 7번 국도변으로 울산 방면에서 경주로 들어서는 입구에 해당한다. 결국 사찰의 사천왕문이 승속의 경계를 지키듯, 왕경을 지킨다는 의미로 이곳에 사천왕사를 세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당시 신라인들은 낭산을 수미산이라 여겼고, 사천왕사 자리는 수미산으로 올라가는 승계의 입구에 해당한다”며 “왕경의 중심부가 불국토라는 관념 속에, 사천왕사를 세워 왕경의 핵심부를 지키려는 문무왕의 뜻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무왕을 추념하는 비석도 사천왕사에 세워졌다. 현재 사천왕사지 입구 풀숲엔 머리가 잘려나간 귀부 2개가 남아 있다. 최근까지 사천왕사지 인근에서 출토된 비편은 2종류로, 문무왕릉비와 사천왕사사적비로 밝혀졌다. 머리가 잘린 2개의 귀부는 이들 비석을 받쳤던 것들이다. 출토된 비편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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