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손희천(孫喜天)의 부인 진양하씨(河氏,1702~1729)는 창녕에서 태어났고, 하용징(河龍徵)의 따님이며, 영의정 진산부원군 하륜(河崙)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곧고 조용하며 맑은 덕이 있었다. 일찍이 월성손씨 집안과 정혼하였지만, 친정 부모의 봉양을 위해 짧은 결혼생활을 보낸 하씨 부인은 갑작스런 남편사망 소식에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다행히 아들이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그의 행적이 전해진다. 사후 10년 뒤인 정사년 12월에 조정에서 특별히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지만, 열부의 인생은 참으로 슬프고 또 슬프다.
남편이 죽자 시어머니는 그녀가 혹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두려워 시종과 번갈아 지키며, 살아남아 아이를 기르라고 매우 애절하게 타일렀지만, 결국 기유년(1729) 8월 25일에 차장(鹺漿:진한 소금물) 한 사발을 마시고 죽었으니 겨우 스물여덟이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집안에서 장례 날짜를 다시 정하여 남편의 선영에 함께 묻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우리 부부가 합근례(혼례)를 치른 지도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는 제때 친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남편이 병들기 전에는 이미 그의 식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병이 든 뒤에는 또 그의 약조차 맛보아 보지 못했다. 살아 있는 동안 어느 한 가지도 정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차라리 함께 죽어 함께 묻혀 저승 아래에서 남편을 받들며 부부로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 남편을 향한 애틋함을 드러냈다.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1685~1757)가 정려각기를 지었고,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 역시 「題烈婦河氏㫌閭閣記後」를 기록하였다.
열부 하씨 정려각기 임신년 - 매산 정중기
계림부 황남리에 붉은 현판과 문설주가 높이 우뚝 솟아 빛나고 있었으니, 이는 열부(烈婦) 하 유인(孺人)의 정려이다. … 14세에 어머니상을 당해 예법대로 초상을 치뤘고, 홀로된 아버지와 오빠는 병들었으며 집안 또한 가난하였으나, 봉양과 제사는 반드시 힘껏 마련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경절공 손중돈(孫仲暾,1463~1529)의 후손 월성 손희천과 정혼하였다.
무신년 정월에 아버지가 끝내 세상을 떠나자 통곡하며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고, 몸소 정성껏 염습하였다. 장례를 마친 뒤 장차 시댁에서 데려가 시어머니를 뵈려 하였으나, 유인은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쳐 사사로운 정을 다하고 싶다 청하였고, 시댁에서 이를 가엾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해 12월에 남편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졌고, 유인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으나, 집에 이르기도 전에 남편의 부고를 들었다. 그녀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하늘을 울부짖다가 몇 번이나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다.
당시 유인은 임신한 지 이미 여섯 달이었기에, 시어머니 조씨(曺氏)가 울며 타이르길 “죽은 사람은 이미 애처롭지만, 만약 네가 유복자까지 지키지 않아 대가 끊긴다면 참혹하지 않겠느냐. 너는 부디 마음을 억누르거라.”하자, 유인은 억지로 미음을 먹으며 살아갔다. 이듬해 4월에 아들을 낳았고, 몇 달 뒤에 아이가 점차 웃고 장난하게 되자, 미음을 먹였는데 아이가 잘 삼켜 먹었다. 유인은 살며시 웃으며 “이제 너는 죽지 않겠구나.”말하고, 남편의 장사지낼 날이 9월 1일로 정해지자, 유인은 속으로 남편과 한 무덤에 묻힐 것을 맹세하였다.
장례 엿새 전에 시어머니와 몸종이 잠시 밖에 나간 틈에 몰래 방으로 들어가 독약 한 사발을 마셨고, 시어머니가 놀라 달려와 구하려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조정에서 정문을 세운 지도 이미 15년이 지났고, 초가지붕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이에 마을 선비들과 그 후손 손우각(孫友覺)이 힘을 모아 집을 새로 짓고 기와를 얹어 다시 모월 모일에 현판을 걸었다. 그 후손이 와서 일의 전말을 기록해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후손이 바로 유복자로 태어난 그 아들이었고, 지금은 장가들어 자식까지 두었으니, 이는 하 유인의 굳센 절개와 열행이 신명을 감동시켜 후손을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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