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속에 빵을 집어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다들 아실 테다. 빵의 전분은 즉각 포도당으로 전환되어 혈당을 마구 오르게 한다. 이때 주문한 음식이 순차적으로 테이블에 오르게 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음식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날 즈음이다. 급격히 올랐던 혈당이 이제 훅 하고 떨어지는 타임이다. 바로 ‘혈당 스파이크’다. 주지하다시피 혈당이 급격하게 오르면 이를 낮추기 위해 췌장은 인슐린을 대량으로 분비하게 된다. 그 결과 혈당이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90분 정도가 소요된 딱, 이 타이밍에 웨이터가 은근히(!) 다가와 묻는 척 유혹한다. “다 드셨습니까? 디저트는...”
여기까지가 배가 부른대도 디저트를 주문하는 과정이다. 유혹은 달디달고 우리는 믿기 힘들 정도로 무기력하다. 인간은 설탕처럼 달콤한 음식에 왜 이토록 쉬이 중독되는 걸까? 눈앞에 있는 그 많던 음식들이 어느새 사라진 즈음 우린 고백한다. “내 의지가 약해서 또 과식을 해버렸어.”
하지만 너무 자신에게 가혹할 필요는 없다. 원래 우린 유혹에 약하도록 설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표현해 유혹에 최적화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는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거나한 식사 이후에도 설탕투성이 디저트에서 눈을 못 떼는 이유는 뇌에 있지 의지랑 상관없다. 먼 미래의 건강보다 바로 지금 눈앞의 달콤함이 훨씬 선명하고 자극적이다. 우리 뇌는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보상을 더 반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의지력 부족 같은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 신경학적 특성에 근거한다.
허기진 상태에서 먹은 식전 빵으로 올랐던 혈당이 갑자기 뚝 떨어지면 다시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게 된다. 이 무의식적 리듬을 결코 놓칠 리 없는 유혹은, 아주 예의 바른 질문 형태로 다가온다. “오늘 디저트는 ○○인데요, 커피는 아메리카노 괜찮으세요?” 이 친절한 질문을 곱씹어보면 누구라도 그 저의를 눈치챌 수 있다. 주문 여부가 아니라 ‘확인’ 작업이란 걸 말이다. 즉 선택(커피)의 자유를 주는 듯 이미 결과(디저트)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해 매출을 올리는, 아주 그냥 설탕을 잔뜩 입힌 정치적 수사(修辭)가 아닐 수 없다.
그뿐이 아니다. 식전 빵은 공짜 서비스 개념으로 알기 쉬운데 절대 아니다. 오히려 식사의 ‘첫 단위’를 키우는 장치랄까. 빵을 담은 바구니가 크다 보면 자연스레 손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리필도 몇 번 하게 되고,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메인 요리와 디저트까지 일사천리로 주문할 가능성이 커진다. 빵 바구니와 요리 접시가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라. 이는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음식의 단위 문제다. 가령 햄버거를 주문할 때도 어김없이 듣는 소리가 “라지(large size)로 바꾸시겠어요?”하는 멘트다. 내 의향을 묻는 것이 아니라 단위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대용량 과자를 파는 것도 계산된 상황이다. 가성비가 좋다며 마음껏 먹다 보면 어느새 단위가 커져 결국엔 필요 이상을 섭취하게 된다.
유혹이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리필한 식전빵과 메인 요리로 배는 충분히 부르다. 추가 음식이 더 이상 생존에 즉각적인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뇌는 아랑곳하지 않고 희망에 부풀어 있다. “디저트가 무슨 맛일지 너무 궁금해” 위장에서는 ‘그만!’ 하는데 뇌는 ‘더! 더!’ 기대하고 희망한다. 보상(reward)이 불확실할수록 뇌는 ‘혹시 모를 더 큰 만족’에 더욱 강하게 반응하는 본능은 과학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약한 의지는 죄가 아니다. 굳이 죄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유혹에 최적화된 환경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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