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된 고조부 사정공 권수해(權壽海)가 영일로 유배 왔고, 증조부 사직공 권효충(權孝忠)이 다시 경주로 이주하며 경주에 정착하였다. 부친 첨정공 권계중(權繼中), 모친 양성이씨 이세주(李世柱)의 따님 사이에 안강현에서 태어난 권덕린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이 남편을 잃은 부인은 어린 종을 시켜 자식의 곁을 지키게 하고, 독서와 암송을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면 종을 시켜 매질하게 하였으니 가르침과 감독이 매우 엄격하였다. 매일 아침저녁 모친께 문안을 거르지 않았고, 몸을 봉양하고 뜻을 즐겁게 하였으며, 아우 권덕란(權德鸞)과 늘 화목하고 즐겁게 지냈다.
허엽의 「옥산서원기」에 “합천군수 권덕린 공은 회재 이 선생의 제자이다(陜川郡守權公德麟。晦齋李先生之學徒也).”라고 회재와 권덕린의 사제관계를 언급한다. 회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과 침묵하는 분이어서 남이 찾아와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유독 권덕린에 대해서는 그 뜻을 가엾게 여기고 재주를 사랑하여 극진히 이끌어 주었다.
매산 정중기의 「행장」을 보면, “여덟아홉에 이미 문의(文義)에 능통해 문장을 지을 수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회재 이 선생 문하에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이 선생은 그의 뛰어난 자질을 사랑해 허락하고 차례로 경서를 가르쳤는데, 스승과 강론 자리에서 말 밖에 담긴 뜻까지 미루어 밝혀내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 아이는 사람을 깨우치는 점이 많으니, 함께 강학하면 매우 유익함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숙부[이필(李苾)]의 따님을 아내로 맞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정미년(1547:양재역벽서사건)에 선생께서 관서지방으로 유배가자 학문을 마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구봉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는 문을 닫고 고요히 처하며 서사(書史)를 탐구하고 토의하며 수신하였다. 계축년(1553)에 급제하고, 그해 겨울에 선생의 부고를 듣고는 길 도중에서 영구(靈柩)를 맞이해 돌아왔다. 이후 병조좌랑·예조좌랑을 지냈고, 외직을 청하여 회덕과 하동의 수령이 되었는데 모두 좋은 치적과 명성을 남겼으며, 경오년(1570)에 합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아쉽게도 45세에 졸하여 부의 북쪽 두류동 선영에 묻혔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아들 권사의(權士毅)는 순릉 참봉이 되었고, 딸은 선비 안대해(安大海)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두 아들 권사민(權士敏), 권사후(權士詡)가 있다.
간옹 이헌경(1719~1791), 청대 권상일(1679~1759)이 묘갈명, 매산 정중기(1685~1757)는 행장, 여와 목만중(1727~1810), 고계 이휘령(1788~1861)이 『구봉유집』 서문, 정헌 이종상이 후서, 매호 손덕승이 묘지명 등을 지었다. 하지만 저술한 유문은 모두 병화(兵火)로 흩어져 잃어버렸고, 다만 과거시험 답안 2편만 남아 학문을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신미년(1571)에 향리 동지들과 함께 안강현 관아에 모여 옥산에 서원을 세우기로 의논하였고, 토지 측량의 불공정을 바로잡고, 세금 부담을 고르게 했으며, 지나친 부역을 감면해 백성들이 제때 농사짓게 하였다. 옥산서원은 권덕린 사후 이듬해(1574)에 사액을 받는다. 또 학교를 중수하고 인재를 길러 경전 교육과 예의를 가르쳐 풍속을 크게 변화시켰으니 그의 공적은 크다고 말할만하다.
합천군수 구봉 권 공 묘갈명-간옹 이헌경
화산 권씨(花山權氏) 종중은 비조(鼻祖)인 고려 태사공(太師公) 권행을 동도의 운곡(雲谷)에서 제사 지내고 있고, 태사의 자손 가운데 어진 사람 두 명[권산해·권덕린]을 함께 배향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구봉공(龜峯公)이다. 나는 그들의 요청으로 축하(祝嘏)의 글을 지었고, 이어 다시 구봉공의 묘명(墓銘)을 부탁받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지금 태사공으로부터 거의 천 년이 지났고 자손은 매우 번성하며 뛰어난 인물도 많았으나, 오직 한두 현인만이 태사공과 함께 배향되고 나머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구봉공의 어짊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음을 알 수 있기에 기꺼이 서문을 지어 말한다.
아, 애석하도다. 처음에는 끝내 스승의 가르침을 마치지 못하였고, 중년에는 오래도록 벼슬살이 일에 시달렸으며, 끝내 또 천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공으로 하여금 큰 인재를 이루어 백성들을 복되게 하지 않으려 한 것인가? 공은 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고, 하나뿐인 아우를 사랑함에 매우 은애로웠다. 집안을 다스림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어찌 나라를 다스린들 잘하지 못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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