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大唐)이 위대한 왕업을 여니 / 높고 큰 황제의 포부 창성하여라 /
전쟁이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 문치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잇는다 / (중략) /
나부끼는 깃발은 어찌 그리 빛나며 / 징과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
황명을 거스른 변방 오랑캐는 / 베이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 (중략) /
삼황오제가 이룬 한결같은 덕이 / 우리 당 황실을 비추리라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의 오언율시 ‘태평송’(太平頌)이다. 『삼국유사』 진덕왕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신라엔 첫 여왕인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에 이어 제28대 진덕여왕, 제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 등 세 여왕이 있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사촌으로, 세 명의 신라 여왕 중에서도 존재감이 가장 미약하다. 선덕여왕은 알아도 진덕여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상당수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주도한 정권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한 임금’ 정도가 그에 대한 대중의 평가다. 그나마 알려진 게 ‘태평송’으로, 당나라를 찬양하는 노래를 짓고 비단에 자수를 놓아 바친 일이었으니 굴욕감마저 준다.
이는 존망의 기로에 선 나라 사정과 무관치 않았다. ‘태평송’은 백제와 고구려의 거듭된 침공으로 풍전등화에 놓이고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던 신라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진덕여왕은 몸소 당나라를 찬양하는 노래를 수놓아 구원의 손길을 간구한 것이다. 신라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도는 당나라와의 군사동맹뿐이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선덕여왕 11년(642)을 기점으로 심각한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7월 백제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 서쪽 40여 개 성을 빼앗았다. 새로 즉위한 의자왕은 신라의 명줄을 끊겠다는 듯이 친히 출병해 군사를 독려했다. 554년 관산성(옥천) 싸움 도중에 붙잡혀 참수당한 성왕의 원수를 갚자며 전의를 불태웠다. 흩어져 성을 수비하던 신라군은 백제 대군의 총공세에 무력하기만 했다.
당시 신라에 가장 뼈아픈 타격은 대야성 함락이었다. 대야성은 서쪽 국경 지역을 아우르는 전략 요충지로 이곳을 빼앗기면 수도 서라벌이 적의 사정권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풍전등화의 위기는 진덕여왕이 즉위하던 647년까지 이어졌다. 때문에 진덕여왕은 백제를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648년 김춘추는 아들 문왕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 태종은 늠름하고 위엄 있는 김춘추의 모습에 반해 후하게 대우했다. 김춘추는 황제를 만나 백제의 침공을 거론하고 출병을 요청했다. 천하 구도를 논하며 고구려에 설욕하려면 백제를 먼저 쳐야 한다고 진언했을 것이다. 당 태종에게 고구려 원정 실패(645)는 회한이었다. 신라의 군사 지원을 방해한 백제의 행위도 떠올랐을 것이다. 김춘추의 집요한 설득에 황제는 당군의 출병을 약조했다.
하지만 당태종은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신라는 그의 아들 고종이 약조를 실행에 옮기도록 사대(事大)에 공을 들였다. 649년 관리들의 의관을 당나라 복식으로 바꿨다. 650년엔 고유 연호 ‘태화’(太和)’ 대신 당나라의 연호 ‘영휘’(永徽)를 썼다. 같은 해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아들 법민(훗날 문무왕)을 당나라에 보내, 자신이 손수 짓고 비단에 수놓은 오언율시 ‘태평송’을 황제에게 바쳤다. 시구처럼 ‘황명을 거스르는’ 백제와 고구려를 벌하라고 청했다. 살아남기 위한 신라의 몸부림이었다.
더욱 격렬해진 전선은 김유신에게 맡겼다. 그는 심리전에 능한 장수였다. 적군을 속이는 교묘한 전법뿐 아니라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수완도 출중했다. 진덕여왕 때 동잠성(김천) 등지에서 백제군과 맞붙었는데 몹시 고전했다. 이에 김유신 휘하의 비령자와 아들 거진, 종 합절이 차례로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를 지켜본 신라군은 격분해 단숨에 백제군을 무너뜨렸다.
김유신의 존재감은 김춘추의 외교전을 뒷받침하는 힘이었다.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없으면 당나라는 승산을 낮게 보고 군사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김춘추가 당태종을 만나 외교전을 펼칠 무렵 김유신은 백제 땅으로 들어가 대야성을 포함한 2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진덕여왕은 신라가 독자적으로 사용하던 연호를 버리고 중국의 연호와 의관을 사용했다는 점, 당나라를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황제에게 바쳤다는 점 등에 대한 비판이 따른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고,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당과의 외교에 사활을 걸어야 했기에 굴욕적인 것이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보기에 따라선 ‘태평송’을 지어 바친 진덕여왕의 모습은 국난 극복과 대안 마련을 위한 노력으로 읽힐 수도 있다.
진덕여왕의 무덤은 경주 북쪽 현곡면 오류리 안태봉 중턱에 있다. 사적 제24호 ‘전(傳, 알려진) 진덕여왕릉’이다. 하지만 이 무덤에서는 결정적인 흠결이 보이는데, 8세기 중반 이후 나타나는 십이지신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상당수 학자들은 진덕여왕 무덤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분위기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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