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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부사 심원열 첨성대를 읊조리다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31호 입력 2026/05/14 07:40 수정 2026/05/14 07:4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청송심씨 학음(鶴陰) 심원열(沈遠悅,1792~1866)은 증조부 심형운(沈亨雲), 조부 심낙수(沈樂洙,1739~1799), 부친 심노암(沈魯巖,1766~?)의 가계를 이룬다. 정조 때 노론 시파의 대표적 인물로 사헌부장령·제주목사를 역임한 심낙수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입장을 유지하였지만, 벽파가 정치를 장악하면서 시파의 탄압으로 유배되는 수난을 겪어 청송심씨 가세 역시 기울어 간다.

그는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음관(蔭官)으로 1835년(헌종1) 44세에 선공감 감역에 임명, 1838년(헌종4) 경조부 주부를 거쳐 청양현감에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6월에 충청우도 암행어사 조휘림(趙徽林)이 청양현감 때의 잘못을 보고해 죄를 받았다. 그리고 1855년(철종6) 7월에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부임해 17개월을 다스렸고, 1857년 정월에 진주목사로 부임하였지만, 충청도 암행어사 서승보(徐承輔)는 공주 전전 판관의 잘못 그리고 이듬해 경상우도 암행어사 서상지(徐相至)·경상좌도 암행어사 임응준(任應準) 감찰에서 울산부사 시절의 공화범용(公貨犯用:공금횡령)이 고발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옛 부임지였던 울산 땅에 유배되는 즉지정배(卽地定配) 형벌에 처해지는 등 굴곡진 벼슬살이를 보냈다.

주로 시파계열의 인물과 교유하였고, 그 가운데 김준(金䥧)·권상신(權常愼)·김조순(金祖淳) 등 담정(藫庭) 김려(金鑢)를 중심으로 16명의 문인이 도회지 문학을 지향하며 정조의 문체반정 정책과 대립하는 담정그룹의 인물과 교유하며 지대한 문학적 영향을 받았고, 『학음산고(鶴陰散稿)』 저서가 전한다.

울산부사로 재직 시 경주를 오가며 문인의 회합과 경주 문화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동경첨성대기」는 첨성대에 대한 문학적 평가로 남는다.


동경첨성대기 - 학음 심원열


경주부의 동남쪽 3리쯤 되는 곳에 대 하나가 있다. 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대를 쌓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높이는 19척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여 사람이 그 속으로 드나들며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으니, 천문을 관측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첨성대라 한다.

1.곡식과 밭두둑 사이에 수 척의 높이로 솟은 첨성대

2.땅에는 기초가 지축 속에 이어지고 밖으로는 그림자가 푸른 산과 마주한 첨성대

3.세워진 모서리는 해를 재고, 해와 달의 밝음을 살피는 첨성대

4.층계를 올라 구름을 바라보고 별자리의 운행과 분수를 점치는 첨성대

5.하늘의 운행이 궤도를 따라 순조롭게 운행하고 태평의 별자리도 평온한 첨성대

6.재앙의 낭성이 나타나지 않으니 천상이 깨끗한 첨성대

7.비와 볕이 알맞아 백성이 질병과 재앙을 겪지 않는 첨성대

8.온 들판에 풍년이 들어 백성들 노랫소리가 일어나는 첨성대

9.찬란한 궁전이 가시덤불 속에 묻히고, 큰 화재에도 타지 않고 우뚝 홀로 남은 첨성대

아홉 조목을 늘어놓아 만 가지 형상을 드러내니, 그 대의를 위한 염원을 중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심원열은 경주의 첨성대를 직접 보았고,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의 「첨성대」작품을 참고해 기록을 남겼다. 특히 들판에 우뚝한 대는 별자리의 운행을 점쳐 나라가 평안하도록 하는 장치였고, 병란·군사·변고와 관련된 낭성(狼星)을 관측해 빛이 강하거나 색이 변하면 흉조로 여겼다.

첨성대는 글자 그대로 천문을 관측하는 대로, 『실록지리지』에 “대는 …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 아래는 원형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전한다. 누군가는 33천의 도리천과 선덕여왕의 장례를 위한 묘탑(廟塔)을 주장하지만, 다양한 주장만 있을 뿐 아직도 정확한 첨성대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1546~1632)은 「동도유적(東都遺跡)」 27수에서 “돌을 다듬어 대를 쌓으니 높이가 몇 척인가,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오르내리며 천문을 살폈네. 어리석은 자손들이 천 년의 업을 지켜내지 못했건만, 첨성대 홀로 우뚝이 저녁노을 속에 빛나고 있구나.”기록한다. 순임금은 천자에 올라 선기옥형(璿璣玉衡)으로 칠정(七政)의 운행을 가지런히 바로잡았고, 성대했던 경주에는 첨성대가 있었으니, 천 년의 해와 별의 운행도 앉아서 헤아릴 수 있었다. 심원열은 경주를 지나며 높이 쌓은 첨성대의 웅장함과 지금도 건재한 장인의 뛰어난 솜씨에 감탄하고,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첨성대를 응시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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