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경주시 황성동 도심 한복판. 30년째 한결같이 따스한 온기를 내뿜는 공간이 있다. 1995년 문을 연 황성동 현대2차아파트 경로당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긴 세월 동안 이곳은 단순한 노인 휴게시설을 훌쩍 넘어섰다. 외로움을 달래는 피난처이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정보 광장이었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놀이터였다. 매일 아침 문이 열리면 20여 명의 어르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드는 이곳에서, 적적할 수 있는 노년의 일상은 생동감 넘치는 ‘청춘’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 집 밥보다 훨씬 맛있어”⋯‘베테랑 셰프’가 차리는 밥상 공동체
올해 들어 현대2차 경로당에는 기분 좋은 변화가 찾아왔다.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로부터 ‘중식 매니저’ 2명을 배정받은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과거 식당을 직접 운영했던 이른바 ‘베테랑 셰프’ 출신이다.
“매일매일 반찬이 달라져요. 예전 식당 솜씨가 어디 가나요? 우리 집 밥보다 훨씬 맛있어서 경로당 오는 시간이 기다려진다니까요.”
한 회원의 말처럼 식사 시간은 그야말로 축제다. 단순히 끼니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정을 나누는 ‘밥상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실현되고 있다. 여기에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한몫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에 있던 산나물을 무쳐 오고, 텃밭에서 정성껏 키운 채소를 검은 봉지에 담아 들고 오는 어르신들이 줄을 잇는다.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우리 모두가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회원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결과다. ‘입 구(口)’ 자와 ‘먹을 식(食)’ 자가 합쳐진 ‘식구’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보다 더 완벽하게 구현된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투명·민주주의 원칙⋯손경애 회장의 ‘부드러운 리더십’
손 회장의 운영 철학은 명확하다. 첫째는 투명함, 둘째는 민주적 소통이다. 경로당 운영비와 후원금 내역을 회원 모두에게 낱낱이 공개해 불신이 싹틀 틈을 주지 않으며, 사소한 행사 하나를 기획하더라도 반드시 회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수결의 원칙을 지킨다.
“회장님이 앞장서서 마음을 써주시니, 우리도 서로를 위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 회원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타 경로당이 쉽게 따라오기 어렵다는 이 집단의 화합과 단결은 바로 그 ‘믿음’에서 비롯됐다.
월화수목금금금⋯“집보다 여기가 더 좋아요”
현대2차 경로당 회원들에게는 ‘주말이 지루하다’는 말이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경로당을 찾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혼자 TV를 보며 보내는 시간보다,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윷놀이를 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훨씬 값지기 때문이다.
특히 ‘행복선생님’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어르신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다. 만들기·색칠하기·꾸미기 등 창의 활동으로 잊혔던 미적 감각을 깨우고, 체조와 신체 움직임 프로그램으로 굳어 있던 관절을 풀어낸다. 퀴즈와 두뇌 게임으로는 치매 예방은 물론 성취감까지 맛본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경로당은 유치원을 방불케 할 만큼 웃음소리로 넘쳐난다.
“나이가 들었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움직이니 몸도 마음도 10년은 젊어지는 기분”이라고 어르신들은 입을 모은다.
‘행복 충전소’⋯30년의 불빛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황성동 현대2차아파트 경로당은 이제 한 동네의 자랑을 넘어 경주시의 ‘모범 경로당’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화합이 넘치고, 밥이 맛있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나도 나이 들면 저런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절로 들게 한다.
30년이라는 역사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 긴 시간을 채운 것은 서로를 향한 배려와 따뜻한 밥 한 끼, 그리고 손을 맞잡고 춘 춤사위였다.
“어르신들, 내일은 무슨 반찬이 나올까요? 내일 또 여기서 뵙겠습니다!”
이 기분 좋은 인사가 매일 울려 퍼지는 한, 황성동 현대2차아파트 경로당의 불빛은 앞으로의 30년도 환하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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