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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세월이 빚어낸 어르신들의 ‘행복 공동체’

박재우 기자 clmnpjw@hanmail.net 1727호 입력 2026/04/16 11:34 수정 2026/04/16 14:55
우리 경로당이 최고야[28] 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
고령화 시대의 따뜻한 해법 제시


1992년 럭키아파트 준공과 함께 이듬해 문을 연 이 경로당은 단순한 노인 복지시설의 범주를 훌쩍 넘어섰다. <사진=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확대
1992년 럭키아파트 준공과 함께 이듬해 문을 연 이 경로당은 단순한 노인 복지시설의 범주를 훌쩍 넘어섰다. <사진=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

문득 그런 곳이 그립다. 현관문을 열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누군가 던지는 왁자지껄한 농담에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곳. 경주시 황성동의 자랑, 황성분회 ‘럭키아파트 경로당’ 이야기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삭막해지기 쉬운 아파트 단지 안에서 이웃 간의 정을 꾸준히 일궈온 이 경로당의 이야기는, 갈수록 개인화되어가는 도시 사회에 잔잔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1992년 럭키아파트 준공과 함께 이듬해 문을 연 이 경로당은 단순한 노인 복지시설의 범주를 훌쩍 넘어섰다. 회원들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쌓아온 30여 년의 시간은, 이웃 사이를 사실상 ‘가족’으로 단단히 묶어놓았다. 세월의 무게만큼 머리가 희어진 회원들이지만, 경로당 문지방을 넘는 순간만큼은 청춘의 활기가 그대로다. 강산이 세 번 바뀐다는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이 한결같은 온기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회원들은 경로당이 오랜 세월 흔들림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로 하나같이 ‘배려와 사랑’을 꼽는다. 타인의 허물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것을 먼저 내미는 문화, 그것이 이 공동체를 떠받치는 주춧돌이라는 것이다.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그 정신이, 이곳에서만큼은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말이 아닌 ‘밥상’으로 섬기는 리더십



경로당의 분위기는 남정숙 회장의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사진=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확대
경로당의 분위기는 남정숙 회장의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사진=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
경로당의 분위기는 남정숙 회장<사진>의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남 회장은 직접 땀 흘려 일군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를 수시로 경로당으로 가져와 손수 밥상을 차린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텃밭의 수확물은 고스란히 회원들의 식탁으로 이어지고, 그 정성은 어떤 값비싼 식재료보다 깊은 맛을 낸다는 것이 회원들의 한결같은 평이다.

 

회원들 사이에서는 “회장님이 농사지은 채소로 만든 반찬을 먹으니 이렇게 건강한 것”이라는 말이 반농담, 반진담으로 오간다. 앞치마를 두른 리더가 앞장서니 경로당은 늘 풍성한 잔칫날 같다는 표현도 나온다.

솔선수범하는 리더 곁에는 ‘똑순이’ 총무가 있다. 경로당 살림을 제 집 일처럼 꼼꼼히 챙기는 총무 덕분에 회원들은 몸만 와서 편히 쉬면 그만이다. 수입과 지출을 빈틈없이 관리하는 투명한 운영 방식과 구석구석을 챙기는 세심한 관리는, 회원들 사이의 신뢰를 두텁게 다지는 토대가 되고 있다.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쑥부침개와 호박부침개를 부쳐내는 ‘부침개의 달인’도 있다. <사진=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확대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쑥부침개와 호박부침개를 부쳐내는 ‘부침개의 달인’도 있다. <사진=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


재능기부의 일상화⋯‘달란트’로 엮어낸 나눔의 미학


럭키아파트 경로당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힘은 ‘재능기부의 일상화’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이 이곳에서는 낯설지 않다.

 

경로당에서 쓰는 수건과 행주를 집으로 가져가 정성스레 삶아 오는 회원이 있는가 하면,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쑥부침개와 호박부침개를 부쳐내는 ‘부침개의 달인’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헌신이야말로 이 공동체의 품격을 완성하는 요소다. 이 회원은 청소 봉사도 자청해 도맡아온 것으로 전해지며, 회원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신의 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경로당의 막내 회원은 직접 쑨 도토리묵 무침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 구수한 입담과 재치 있는 농담으로 경로당 곳곳에 웃음꽃을 피우는 ‘비타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별식이 생기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로당으로 들고 오는 풍경은, 핵가족화된 현대 사회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공동체 의식의 귀한 본보기다.
 

양손에 오자미를 쥐고 저글링하며 어린 시절 동심으로 돌아간 어르신들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사진=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확대
양손에 오자미를 쥐고 저글링하며 어린 시절 동심으로 돌아간 어르신들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사진=황성동 럭키아파트 경로당>


절기 음식 나누고, 오자미로 동심 찾고


명절이면 경로당은 더욱 활기를 띤다. 동짓날엔 다 같이 새알심을 빚어 팥죽을 끓이고, 정월대보름엔 오곡밥과 갖은 나물을 나누어 먹는다. 반죽을 빚고 나물을 무치며 나누는 옛이야기 속에는, 어떤 기록에도 남겨지지 않은 시대의 기억이 살아 숨 쉰다.

 

취재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오자미 던지기’ 시간이었다. 양손에 오자미를 쥐고 저글링하며 어린 시절 동심으로 돌아간 어르신들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오자미를 많이 넣은 사람이 나이에 관계없이 ‘형님’, 적게 넣은 사람은 ‘아우’가 되는 규칙 앞에서 평소의 서열은 온데간데없고, 경로당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이날 가장 많은 오자미를 넣은 남정숙 회장을 향해 회원들이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형님아, 참 잘했다! 최고다!”라고 외치자, 남 회장의 얼굴에는 아이처럼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고령화 시대, 경로당이 제시하는 해법


황성분회 럭키아파트 경로당의 30년 역사는 우리 사회가 고령화 시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조용히 제시한다. 제도가 미처 닿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음을, 이곳은 30년의 세월로 증명해왔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둔 지금, 전국 곳곳의 경로당이 이곳처럼 살아있는 공동체의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면, 노년의 풍경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배려와 양보,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이 공동체의 풍경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그리고 쑥부침개 냄새와 어르신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황성동을 오래도록 따뜻하게 지켜주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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