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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정 주인 이범중을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29호 입력 2026/04/30 11:29 수정 2026/04/3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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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여강이씨 이범중(李範中,1708~1783)은 자가 이경(彝卿), 회재 선생의 6대손으로, 대대로 경주의 양좌촌(良佐村)에서 살았다. 선대의 공간이었던 이향정(二香亭)은 1695년(숙종21)에 이범중의 호를 따서 이름하였고, 뒤뜰에 향나무 두 그루가 있으며, 사랑채에는 후손 이재걸(李在杰)의 호 만취정(晩翠亭) 초서 현판이 걸렸다. 후대를 지나며 집의 규모가 더욱 넓어졌고, 지금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후손이 살면서 건물을 관리하고 있다.

‘이향’은 이범중의 거처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정충필(鄭忠弼,1725~1789)의 『노우문집』에 「이향 이범중 어른을 애도하는 만시[挽二香李丈 範中]」,「이향 이범중 공을 애도하는 제문[祭二香李公文]」 그리고 최치덕(崔致德,1699~1770)의 『자희옹선생문집』에 「군수 이향 이범중과 오만중 평보를 전송하다[送二香李郡守範中吳平甫萬重]」,「이이향과 이위솔과 이헌락 경순 등의 제현과 함께 읊다[同李二香李衛率景淳憲洛諸賢吟]」를 보면 이범중 자신을 대변하는 별호로 쓰였다. 훗날 정충필은 선친 정욱(鄭煜)과 막역한 사이로 대대로 정의가 두터웠고 어릴 때부터 교유한 인연으로 이향 이범중의 제문[祭二香李公文 甲辰]을 지었고, 이범중 역시 정충필의 경전해석 글을 보고 주석서[註解]에 실어도 될 만큼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이범중은 1708년에 생부 이덕기(李德祺)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양자로 나가 계부(季父) 동추공(同樞公) 이덕지(李德祉,1683~1771)의 후사가 되었다. 이덕지는 훗날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과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으로 주던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중추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가난한 형편에도 책 읽는 소리는 더욱 굳세고 낭랑한 이범중은 비로소 1741년(영조17) 34세에 식년시 생원에 올랐고, 1746년 장릉(莊陵) 참봉, 상서원(尙瑞院) 직장 그리고 1750년 장원서 별제, 한성부 주부(漢城府主簿), 부모봉양을 위해 1751년 신창 현감(新昌縣監)이 되었다. 1753년에 양모(養母) 정부인(貞夫人) 박씨의 상을 당한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수신을 행하며 살았다. 1762년에 동부도사(東部都事)에 제수되었다가 한성 판관으로 옮겼고, 이듬해 온양 군수가 되었으며, 1768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즐겼다.

관직에 있으면서 그는 “백성을 다스릴 때 구태여 새로운 규례를 창안할 필요가 없고, 또 굳이 예전의 법을 폐기할 필요도 없다. 새로운 규례를 창안하면 백성을 성가시게 만들게 되고, 예전의 법을 폐기하면 백성들이 혹 그에 따른 폐해를 입게 된다.”라고 백성의 힘듦을 염려하였으니, 임기를 마치고 떠나갈 때까지 온 경내의 사람들은 즐겁고 화평하게 지내며 공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부인 평산신씨는 신전(申㙉,1634~1673)의 따님으로, 시부모를 모시고 고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우며 부드러웠고, 집안 살림을 꾸리고 집안의 여러 일을 처리할 적에는 세세한 부분까지 모범적이었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순와(順窩) 이헌유(李憲儒,1733~1804)는 담양 부사를 지냈고, 둘째 둔와(遯窩) 이헌우(李憲愚,1740~1802)는 진사에 올랐다. 첫째 딸은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를 지낸 주일재(主一齋) 이완(李埦)에게, 둘째 딸은 김광일(金光馹)에게 출가하였다. 이완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아들로, 이범중과 이상정은 사돈 관계이자 벗으로서 교분이 깊었다. 훗날 이상정은 이덕지의 만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담양부사를 지낸 장남 이헌유는 부친께서 번암 채제공(1720~1799)과 서울에서 함께 벼슬생활한 돈독한 교분으로 묘갈명[通訓大夫行溫陽郡守李公墓碣銘]을 부탁하였는데, “공은 천진하고 본바탕을 중시하였으며, 법도와 무게를 갖춘 한편 원만하고 실다웠다. 평소 남들과 크게 다르게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일의 대체는 규범의 한계를 넘지 않았다. 양친을 모시면서 말없이 자식 된 직분을 몸소 실천하면서 정성이 깊고 두터웠다. … 집안사람들에게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들로 인해 집안이 결딴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고 경계하였다. 빛나는 장식으로 치장한 사람을 보면 즉시 통렬하게 끊어 내는 한편, 광달(曠達)한 사람으로 자임하며 예법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에 대해서도 깊이 싫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그의 효도와 곧은 심성을 평가하였다.

건축물은 대대로 후손의 터전이 되고, 곧 집안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향정은 비단 향나무 두 그루가 아니라, 양좌동의 이범중을 표현하고 역사가 되는 징표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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