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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오피니언 연재 손진은 시인의 詩間

강아지풀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28호 입력 2026/04/23 10:49 수정 2026/04/23 10:53

강아지풀

 

                                                         김성춘

 

사랑하는 친구 멀리 떠나보낸 가을 아침.


강아지풀 하나


몸 흔들며 바람처럼 흔들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완행버스를 타고


자신의 남은 시간을 생각하며


몸 흔들며 바람처럼 흔들리며


차창 밖엔


바람소리 새소리 낙엽 구르는 소리 가득한 가을


돌아보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세월


이제 마른 몸으로 흔들릴 뿐


꿈꾸듯 잠시 눈부시게 타오르다


캄캄한 우주 멀리 사라져 가는 생.


저 강아지풀 하나


지금 나이가 팔 학년 하고도 삼 반이다.



시인의 자화상으로서의 강아지풀



손진은 시인확대
손진은 시인
하나의 생명을 바라본다는 것은 전 우주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과 충격이다. 특히 시인들의 언어에는 그런 예지의 순간이 존재한다. 하잘것없는 생명, 사물 하나까지도 다 감정이 있고,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그들의 ‘밝은 눈’은 다 보게 된다. 그 자체로 빛을 뿜는 생명과 인간, 사물은 ‘생명’이라는 것의 비의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오늘 시인이 바라본 강아지풀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 작고 마른 강아지풀 하나는 들판이나 언덕에서 자라는 풀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자아가 그렇게 대상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시인은 여든 넘은 연치에 존재론적 응시를 통해 자신을 강아지풀로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의 왜소한 사물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친구 멀리 떠나보낸 가을 아침”이라고 했을 때, 그 가을은 계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고즈넉하고 쓸쓸한 시간이 된다.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았으니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쓸쓸함에 시인은 “완행버스를 타고” 자신의 “남은 시간을 생각”하는데, 웬걸 강아지풀 하나가 버스 안에서 흔들리며 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눈은 이제 차창 밖으로 향하는데, 자신을 둘러싸는 바깥 역시 “바람소리 새소리 낙엽 구르는 소리”로 강아지풀이 된 자신의 내면에 엄습해 온다. 그 순간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세월”이라는 이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간다. 그 시간을 지나 “마른 몸으로 흔들릴 뿐”인 오늘의 자신에 이른 것이다. 시인의 사유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다.

바로 인간 존재가 “꿈꾸듯 잠시 눈부시게 타오르다” 저 “캄캄한 우주 멀리 사라져 가는 생”이라는 것이다. 생 전체가 성냥 하나를 그었을 때 화악 타오르다 꺼지는 불길 같은 수유의 시간이 아니고 무엇이랴.

시인은 마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작은 생명이듯, “저 강아지풀 하나”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어지는 결구 “지금 나이가 팔 학년 하고도 삼 반이다.”를 보면 ‘강아지풀 하나’는 시인의 ‘자화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자화상’을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이 참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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