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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동 선도산 성모사를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27호 입력 2026/04/16 11:24 수정 2026/04/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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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서악동 서악서원을 지나 고분군을 따라 오르면 선도산 정상부 성모사(聖母祠)에 당도한다. 옆에는 마애여래삼존불이 있고, 동쪽으로 200m쯤 가면 성모사 유허비가 나온다. 신라 때 건립된 성모사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정령(仙桃聖母精靈)을 모신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시조왕 위판을 임시 봉안했었다.

 

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1731~1797)는 「신사지(神事志)」에서 “계림 서쪽 선도산에는 성모사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였다. 신라 때 서악(西嶽)으로 불린 선도산은 서술(西述)ㆍ서형(西兄) 그리고 서연(西鳶) 등 솔개와도 연관이 있다. 중국 한나라 제실(帝室)의 딸 사소(娑蘇)가 일찍이 신선술을 배워 신라에 머물렀는데,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매]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이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하였다. 이때 솔개가 선도산에 앉았고 사소는 그곳의 지선(地仙)이 되어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화계 류의건의 동생인 류의택(柳宜澤)이 선도산 기슭에 연곡서당(鳶谷書堂)이라 명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옛날 신명한 임금들은 그 탄생이 보통 사람들과 남달랐으니, 복희(伏羲)의 어머니 화서(華胥)는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감응하여 잉태하였고, 신농(神農)의 어머니 유교(有嬌)는 신룡에 감응하였으며, 황제(黃帝)의 어머니 부보(附寶)는 번개에 감응하고, 소호(少昊)의 어머니 누조(嫘祖)는 별에 감응하며, 전욱(顓頊)의 어머니 창복(昌僕)은 달에 감응하였다.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1572~1652)은 「박씨세계 사실서」에 “임자년(BC69)에 육부 촌장이 알천(閼川)에 모였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 숲 사이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흰 말이 꿇어앉아 절하는 듯한 모습을 보았고, 가서 살펴보니 말은 갑자기 사라지고 큰 알 하나가 있었다. 이를 깨뜨려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고,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춤추었다. 육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기하고 이상하여 거두어 길렀고, 열세 살이 되자 임금으로 세웠다. 큰 알이 표주박(瓠)과 같았기에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라고 박씨의 연원에 대해 설명한다. 신라 성모 파소(婆蘇)가 알[卵]과 관련되어 남편없이 혁거세를 잉태한 것도 이러한 부류와 같을 것이니, 황당함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보통의 사람과 다른 점에 무게를 둔다.

김부식(1075~1151)이 이자량(李資諒,?~1123)을 따라 송나라에서 겪은 일화와 『삼국사기』 그리고 일연스님(1206~1289)의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오주연문장산고』·『여지승람』 등 다수의 기록에 ‘선도성모 즉 파소(婆蘇)=사소(娑蘇)가 어진 이를 잉태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는 일맥한 내용이 실린다. 하지만 신재(信齋) 이영익(李令翊,1738~1780)은 『동국악부』「성모사」에서 “중국인이 선도성모가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창건했다고 기록하지만, 동방은 이 시기에 문물이 열리지 못하였으니 실로 허황된 일이 많다. … 이는 속이는 흔적이 있고, 또 중국 서책의 이치에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이는 거짓됨이 심하다 할 것이다.” 중국의 성모 연관설을 거짓이라 평한다.

성모사 관련 약산 오광운, 원교 이광사, 이영익 등 한시작품 다수가 전하고, 광주노씨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1855~1931)은 「선도산 성모사 중수기」를 지어 내력을 전하였다. 노상직은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창녕 추원재‧극기재‧금산서당(錦山書堂) 그리고 밀양 자암초려(紫巖草廬) 등에서 강학하며, 경남 산청과 함안의 학풍을 주도한 인물이다.


선도산 성모사 중수기 – 소눌 노상직


신라 옛 도읍에 숭덕전에서 그곳을 바라보면 서쪽의 진산(鎭山)인 선도산이 우뚝하다. 고을의 부인과 어린아이까지 양산에서 오색구름과 용이 울부짖으며 신선이 꿇어앉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동천에서 목욕을 받들었다는 등의 모습이 마치 어제 직접 본 것처럼 또렷하다. 성모의 자취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선도산 정상에 예로부터 사당이 있었다. 순조 임진년(1832)에 후손 참봉 박규동(朴圭東)과 박지혁(朴之赫)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지금은 비바람에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전침랑 박기문(朴基汶)이 그의 9대조 박언수(朴彥秀)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도산에 전패(殿牌)를 받들고 난을 피하였는데, 그때 성모와 성자의 영령이 마치 위급하고 곤궁한 가운데 서로 감응한 듯 7일 검은 구름에도 오히려 남은 빛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사당을 수리하는 일이 곧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고, 홀로 힘써 수고하였다. 이때 재랑 박찬배(朴培貽)가 종인 박태진(朴泰鎭)에게 책을 보여주며 “문헌록이 마침내 완성되었고, 사당 역시 공사를 마쳤으니, 어찌 기문을 받아서 수록하지 않겠는가?”하였다. 박태진 군이 나[노상직]와 머물며 사당 공사의 전말을 기록하고자 하였고, 나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 … 이 사당은 단지 박씨 집안만이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나라 사람 모두가 마땅히 함께 공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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