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탑동.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등 초기 왕들이 잠든 사적 제172호 ‘오릉(五陵)’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고분의 묵직한 평온함을 닮은 경로당이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 ‘기적의 쉼터’로 불리는 ‘오릉경로당’이다.
2021년 5월 문을 연 이 경로당은 행정 절차에 따라 세워진 여느 노인복지시설과는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어르신들의 간절한 염원과 눈물겨운 자발적 헌신이 빚어낸 공동체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갈 곳이 없었다”⋯굽이진 길 앞에 주저앉은 노구(老軀)
오릉경로당이 세워지기 전, 탑동 어르신들의 일상은 고단했다. 인근 경로당이 있었지만, 굽이진 길을 한참 걷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무릎이 시리고 허리가 굽은 몸으로 그 길을 오가는 것은 적잖은 고역이었다.
“그저 친구들 만나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싶은데, 그 길이 너무 멀어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집안에만 웅크리고 있으니 마음까지 병이 드는 것 같았지.”
결국 어르신들이 스스로 나섰다.
“남의 손만 빌리지 말고, 우리가 직접 우리들의 쉼터를 만들어보자.” 자발적인 움직임이 마을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 복지의 사각지대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탑동 어르신들은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흙 묻은 손으로 일군 2500만원“내 인생 마지막에 가장 잘한 일”
이 여정의 중심에는 경로당 회원 최장길 어르신이 있다. 평생을 정직하게 땅을 일궈온 농부인 그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밭으로 나가고, 여름 땡볕 아래 한 푼 두 푼 모아온 노후 자금 2500만원을 경로당 건립을 위해 선뜻 내놓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그의 대답은 담담하고도 뭉클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뭐 하겠노. 내 이웃들이, 내 친구들이 다 같이 모여서 등 따습게 쉬어갈 수 있다면 그게 더 보람된 일이지. 내 인생 마지막에 가장 잘한 일이 이 기부가 될 것 같아 기쁘기만 합니다.”
최 어르신의 숭고한 결단은 공동체 전체를 움직였다. 회원들의 자발적 기부와 헌신이 하나둘 모여, 마침내 오릉을 마주 보는 명당자리에 아담하고 포근한 경로당이 자리를 잡았다.
문턱은 낮고 웃음소리는 담장을 넘는 ‘진짜 집’
이곳의 하루는 정(情)으로 시작된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회원들의 손에는 밭에서 갓 딴 채소나 간식거리가 들려 있기 일쑤고, 보이지 않는 회원이 있으면 즉시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한다. 크고 작은 살림살이를 함께 나누고, 아픈 곳이 있으면 병원까지 동행해 주는 것도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여기 오면 외로울 틈이 없어요. 혼자 있으면 벽하고 대화해야 하는데, 여기선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니까요. 우린 성씨는 달라도 다 한 가족입니다.”
미술·체조·노래…몸과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청년들의 공간’
오릉경로당 어르신들은 공부하고 운동하는 ‘청년’들이다. 미술 시간에는 뭉툭해진 손가락으로 색연필을 쥐고 도화지를 채워나간다. 젊은 시절 먹고 살기 바빠 잊었던 예술적 감각이 되살아날 때마다 어르신들의 얼굴엔 소녀 같은 미소가 번진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실버 체조다. 어르신들은 행복선생님의 동작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따라 하며 노화로 야위어가는 근육을 붙잡는다. 노래와 율동 시간에는 신명 나는 가락에 맞춰 몸을 흔들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털어낸다.
회원들의 공통된 증언은 의미심장하다. 동작을 외우고 따라 하는 과정에서 두뇌가 자극돼 치매 예방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운동을 시작한 이후 무기력하던 우울감이 사라지고 숙면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자발적 나눔이 증명한 복지의 본질
오릉경로당은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복지가 국가의 혜택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발적 나눔을 통해 얼마나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장길 어르신의 기부와 회원들의 화합은 오릉경로당을 전국 ‘모범경로당’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곳에는 단순히 건물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뜨거운 정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탑동 주민들은 오릉경로당이 단순한 복지시설을 넘어 마을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경로당 창가 너머로는 오릉의 노송(老松)들이 오늘도 정겹게 서 있다. 그 소나무처럼 늘 푸르고 건강하게,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오릉 벌판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기부는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오릉경로당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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