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1천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 번성하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됐다. 그 흔적은 지금도 경주 곳곳에 남아 있다. 그 흔적은 신라에 살았던 이들을 떠올릴 수 있는 타임머신이다. 경주에 남은 고대 유적을 둘러보며 옛 신라인을 만난다. /편집자 주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는 점에서 대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신라 사람들에게도 여왕은 몹시 낯선 대상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왕 또한 여성이었으나 유독 선덕여왕에 대해서만 그의 신이한 능력을 강조하는 설화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그가 ‘첫 여왕’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널리 알려진 ‘지기삼사’(知幾三事), 풀이하자면 선덕여왕이 미리 알았던 세 가지 일은 그의 신이한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설화다. 첫 번째 설화는 당나라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을 보고 이 꽃에 향기가 없음을 예견하였고, 두 번째는 옥문지에서 겨울임에도 개구리가 많이 모여 울자 옥문곡(혹은 여근곡)에 백제 군사가 쳐들어왔음을 알아차렸으며, 세 번째는 선덕여왕 자신이 죽을 날과 죽은 후 도리천에 묻힐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분황사는 이 첫 번째 설화와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여왕 권위 높이려한 첫 시도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느 날 진평왕이 덕만공주를 불러 당나라에서 선물로 보내온 모란꽃 씨앗과 모란꽃 그림을 보여줬는데 공주는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니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이에 놀란 진평왕이 시험 삼아 씨를 심어보도록 했는데 훗날 만개한 모란꽃에선 덕만공주의 말대로 향기가 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는 덕만공주의 남다른 눈썰미와 통찰력을 부각시켜 훗날 진평왕의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일화로 해석되지만, 덕만공주가 자신을 ‘향기가 나지 않는 꽃’에 비유해 모욕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음을 간파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처럼 여자로서 선덕여왕은 신하들의 반발과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로 고전했다.
그는 재위 3년째인 634년 황룡사 북쪽에 조성 중이던 사찰을 완성한 뒤 분황사(芬皇寺)란 이름을 붙였다.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을 넣어 ‘향기가 나는 황제의 절’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처럼 여성적인 색채가 강조된 분황사라는 이름으로 미뤄볼 때, 과거 공주시절 자신을 조롱했던 ‘모란꽃 그림’ 일화에 응수해, 불교의 힘을 빌려 여왕의 위엄과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반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분황사는 탑 하나, 법당 하나, 우물 하나가 거의 전부인 자그마한 절로 남았다. 하지만 신라 시대 분황사는 담을 맞대고 있던 황룡사와 함께 신라불교의 중심 역할을 했던 거대한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 대중화의 선각자로 꼽히는 원효(元曉)를 비롯해 자장(慈藏) 등 당대 이름난 고승들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다. 특히 원효는 이곳에 머물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고 한다.
신라의 대표적 학자로 꼽히는 설총은 아버지인 원효가 죽은 뒤 그 유골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이곳에 모셨다고 하는데, 여기엔 원효가 분황사에 머물렀던 인연이 작용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고려시대엔 임금의 명으로 원효를 기리는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이곳에 세워지기도 했다. 그밖에도 사찰이 한창 번창할 당시 이곳엔 솔거가 그린 천수관음보살 벽화도 있었다고 전한다. 분황사가 특별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가장 오래된 신라 탑⋯분황사 모전석탑
오늘날 분황사를 상징하는 건 절집 중앙에 자리 잡은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이다. 634년 분황사 창건 당시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의 정식이름은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본래는 9층 탑이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훼손돼 3층만 남았다.
모전(模塼)이란 ‘벽돌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당시엔 중국을 중심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塼塔)이 유행했는데, 벽돌을 찍어내는 건 엄청난 자원과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벽돌을 구울 때 땔 나무를 대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 돌을 깨서 벽돌을 모방해 탑을 쌓은 이유다. 이렇게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깨서 쌓은 탑을 모전 석탑이라 부른다.
전탑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 시작했으며 지금도 유적이 인도 곳곳에 남아 있다.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도 전래됐는데 숭악사 12각15층탑(523년 조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해 통일신라 때 전성기를 맞았고 고려 시대에도 건립됐다. 그사이 전탑을 모방한 모전탑이 등장했다. 모전탑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탑의 양식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우리나라 불교 탑의 발전 양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탑의 발달은 대체로 목탑, 석탑의 순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신라는 특이하게도 전탑과 모전석탑이라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쳐 석탑으로 발전해 간다.
『삼국유사』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는 신라 최고의 예술가였던 승려 양지를 소개하면서 “영묘사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 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불교의 여덟 수호신)과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양지)가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모전탑)를 만들었고,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양지가 모전탑을 처음 세웠는데 그 이전에 전탑이 존재했고 이 탑과 탑에 쓰인 기와를 양지가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전탑이 모전탑에 앞서는 증거로 인용된다. 대표적 모전탑인 분황사탑이 7세기 전반에, 대표적 전탑인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1세기 가량 늦은 8세기에 조성된 것을 볼 때 ‘전탑-모전탑’의 순서는 대체적 경향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돌 다루는 기술이 앞섰던 백제는 전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목탑에서 바로 석탑으로 옮겨갔다. 목탑 형식으로 쌓은 돌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신라도 통일이후 석조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전탑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모전석탑의 백미로 남아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국내 불탑 492기 가운데 모전석탑은 1.6% 수준인 8기에 불과할 정도로 희소성을 자랑한다. 이 가운데 분황사석탑은 모전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지만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분황사석탑’이란 시에서 ‘석탑이 정말 우뚝하여’(石塔正嶙峋)라고 노래한 것으로 미뤄볼 때, 당시만 하더라도 탑은 온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경잡기』에 따르면 분황사 석탑은 임진왜란 때 왜병이 훼손했고, 그 뒤 분황사 스님이 고치려하다가 또다시 허물어뜨렸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 해체 수리 때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됐다.
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약 13m, 높이는 약 1m 규모다.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몸돌받침을 마련하고 몸돌을 쌓았다. 기단 위 네 모퉁이엔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상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해체 수리가 이뤄졌던 1915년엔 기단 위에 모두 여섯 마리의 사자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두 마리는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옮겨갔다고 전한다.
1층 몸돌 4면엔 각각 부처를 모셔두는 공간인 감실(龕室)을 만들고 문을 달았다. 감실의 문 양쪽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세웠다. 몸돌은 진회색의 안산암을 잘라 각 층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전탑과 비슷하다. 1층은 34~37단으로 이뤄져 있고 2층과 3층의 몸돌은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든 모습을 하고 있다.
석탑 내부는 큰 돌과 모래, 자갈 등으로 채워져 있다. 지진 등 외부 충격으로 인해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몇 해 전 경주 지진 때 첨성대가 무너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한편, 1915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탑의 2층과 3층 사이에 있던 석함(石函) 안에서 사리장엄구와 각종 공양구가 발견됐다. 당시 발굴조사보고서가 정식으로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토 현황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도면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은합(銀盒), 녹유리병 조각, 원반형 수정, 곡옥, 금제귀걸이, 금제장신구, 금은제 바늘, 동제 가위, 침통, 조개껍질류 등이다. 그밖에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숭령통보(崇寧通寶) 등 화폐도 다수 발견됐다. 그 가운데 숭령통보는 1102년에서 1106년까지 중국 송나라에서 사용된 화폐로, 이를 근거로 고려 숙종~예종 대에 이 석탑의 수리가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출토 유물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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