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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문신 질암 최벽 선생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23호 입력 2026/03/19 13:02 수정 2026/03/19 13:07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이은 제도로 정조의 문화정책 수행과 인재양성의 일환이었다. 경주최씨 질암(質菴) 최벽(崔璧,1762~1813)은 1790년(정조14) 11월에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가문을 빛냈다. 그는 사성공파 최예(崔汭)의 후손으로, 증조 최하기(崔夏基), 조부 최경담(崔慶聃), 부친 달성인 최종섭(崔宗燮)의 가계를 이루고, 이조리에서 태어났다. 말년에 욕심 없고 성공과 명성에 무심한 상태의 담박(淡泊)한 삶에 만족하였으나, 아쉽게도 52세에 타계하였다.

어려서 부친과 숙부 최종건(崔宗乾)에게 가학을 익혔고, 13살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도시(道試)에 나가지 못하다가 16세에 비로소 장원하였다. 1783년(정조7) 22세에 한산이씨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의 문하생으로, 소산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생원시와 전시(殿試)에 합격했으나,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은 불행한 일이라 여기고, 소산 문하에서 『심경』과 『근사록』 등에 매진해 학문의 근본을 닦았다. 성균관전적·예조좌랑 등을 역임한 후,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에도 부모 병환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며, 정조가 승하하자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1793년(정조17)에 초계문신의 친시(親試)와 과시(課試)의 시권을 채점하며 “본조의 초계문신 최벽에게 영남 사람들은 질박한 사람이 많고[嶺人多質], 『주역』을 암송하는 것이 월등하다.”라는 가르침을 받고 호를 ‘質菴’으로 삼았다.

도와(陶窩) 최남복(崔南復,1759~1814)은 1813년 「행장」에서 “항상 말하기를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부분 재물과 이익의 득실에서 생긴다. 비록 조상을 위해 쓰는 제사의 공물이라도, 만약 친족 간의 화목을 해칠 우려가 있으면 굳이 따져 묻거나 까다롭게 찾으려 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겸손하고, 남을 대할 때에는 오로지 충(忠)과 서(恕)의 마음으로 대하라.’ … 또 고을에서 치암 남경희와 뜻과 기개가 서로 잘 맞아 깊은 우정을 맺었고, 서로 의기투합하여 막역한 친구가 되었는데, 매번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시국의 시비나 정치적인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 자는 척 듣지 않으려 하였다.”라고 질암 최벽의 곧은 성품을 언급한다. 1930년에 현손인 최해규(海奎) 등이 『질암집』을 편집·간행하였고, 문집 서문은 1817년에 족제 근암 최옥(1762~1840)과 1930년에 이중철(李中轍,1848~1934) 그리고 발문은 족현손 최현필(崔鉉弼), 행장은 최남복, 묘지명은 김굉(金㙆) 등이 지었다.

소산 선생은 최벽에게 답한 편지에서 “근래에 공부는 어떠한가. 세상은 과거시험을 향해 분주히 달려가는데, 그대는 젊은 나이에 한가로이 물러나 있으니, … 이에 스스로 힘쓸 바를 생각하여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 한 부 주자(朱子)의 저서가 바로 그 방법이니, 여기에 힘을 다해 단단히 공부하여 실제로 체득하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한가한 틈이 있으면 옛사람의 책을 마주하여 의리로 마음을 적셔 주면 좋겠다. 『심경』을 반복해 공부하고 있다고 들으니, 그것이야말로 지금 그대에게 꼭 맞는 약제와 같다. 읽을 때 입으로만 대충 넘기지 않도록 삼가고, 한마디 한 구절마다 반드시 마음과 몸으로 체득한다면 오래도록 자연히 온 마음과 삶이 하나로 어우러지게 될 것이다.”라고 과거에 집중하지 않는 걱정과 『심경』을 집중해 읽는 칭찬과 과정을 언급하였다. 심성 수양에 관한 『심경』은 퇴계 이황 역시 심학의 근원과 심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깨우친 중요한 경전이었다.

공자는 “본바탕이 외관을 앞지르면 촌스럽고, 외관이 본바탕을 앞지르면 겉만 번지르르하게 된다. 사람의 외관과 본바탕이 함께 빛나며 조화를 이룬 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라고 하였다. 만약 문(文)과 질(質)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우세하려 한다면, 차라리 문이 지나친 것보다는 질이 있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1809년 치암 남경희는 질암의 거처를 방문해 기문을 남겼는데, “질은 인의(仁義)보다 귀한 것이 없다. 인의는 부자와 군신의 도이며, 하늘에서 받아 본성에 뿌리를 두니 어찌 단지 부자 관계만 그러하겠는가. 효자는 한 걸음을 내딛을 때에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않으며, 충신은 한 끼 밥을 먹을 때에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부모를 잊지 않는 마음이 질이 된 뒤에야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예의 형식이 이뤄질 수 있고, 임금을 잊지 않는 마음이 질이 된 뒤에야 공손히 절하고 예를 갖추는 형식의 예가 논의될 수 있다. 지금 최벽이 집의 이름을 지은 뜻이 임금을 잊지 않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그 질이 이보다 더 훌륭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질암의 질을 강조하였다.

1812년(순조12) 6월에 왕세자 책례(冊禮)를 축하하는 반열에 참여한 이후에 다시는 궁궐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몇몇 뜻을 같이할 사람들과 용악(龍嶽) 아래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은거하며 여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흩어진 잡목으로 은신처를 짓고 거문고와 독서로 도연명의 뜻을 취하는 청빈한 삶이었으나, 집이 완성되기도 전에 둘째 아들이 죽으면서 몹시 슬퍼하였다. 훗날 질암의 6세손 최상덕씨가 선조의 덕을 기리기 위해 2013년 내남 안심리에 사비로 질암정사(質菴精舍)를 건립했다고 하니 정성이 감동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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