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기획특집 2026 경주 여성기업인

“서로 말없이도 통하는 옷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오선아 기자 suna7024@hanmail.net 1722호 입력 2026/03/12 14:37 수정 2026/03/12 15:10
경주를 움직이는 힘, 여성기업인 릴레이 인터뷰② '수담' 김이본 대표
드레스 짓던 손으로 군복 만들다

경주 곳곳에서 묵묵히 기업을 이끌어가는 여성 CEO들을 조명합니다. 경주신문은 2026년 특별기획 ‘경주를 움직이는 힘, 여성기업인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진솔한 경영 철학을 기록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섬세한 리더십과 뚝심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여성 기업인들의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께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경주신문은 지역 여성 기업인들의 제보와 추천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김이본 대표는 경주에서 유일하게 직접생산 확인증명을 가진 유니폼 업체 ‘수담’을 운영하고 있다. 오선아 기자확대
김이본 대표는 경주에서 유일하게 직접생산 확인증명을 가진 유니폼 업체 ‘수담’을 운영하고 있다. 오선아 기자

줄자를 손에 감은 채 마네킹 앞에 선 김이본 대표의 눈매가 날카롭다. 어깨선을 따라 줄자가 움직이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1센치를 다시 잰다. 경주에서 유일하게 직접생산 확인증명을 가진 유니폼 업체 ‘수담’. 올해 서른셋, 대표이자 디자이너다.



웨딩드레스를 만들던 사람이 유니폼의 세계로


김이본 대표의 시작은 유니폼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뒤 드레스 업계에서 일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비즈를 붙이고 무거운 드레스를 들어 올리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만드는 일 자체가 좋았지만 몸이 먼저 망가졌다.

 

이후 우연히 유니폼 회사에 취업하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났다. “디자이너라고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에요. 미팅도 하고, 제안서도 만들고, 공장에서 검수하고, 포장까지 해요. 처음엔 왜 디자이너가 서류작업까지 하지? 싶었죠.”

웨딩 쪽에서는 샵 안에서 작업만 하면 됐지만 유니폼은 입찰 빼고 전부 해야 했다. 사람 만나는 일이 편하지 않은 성격이었지만 부딪히며 익혔다. 미팅에 나가고, 공장에서 품평을 하고, 납품 포장까지 도맡았다. 그때 유니폼 업무의 전 과정을 몸으로 배운 것이 훗날 창업의 밑바탕이 됐다.

결혼을 계기로 남편의 고향인 경주에 내려왔다. 연고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이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2019년 통신판매업으로 사업자를 냈고, 2022년 본격적으로 제조업으로 전환하며 상호를 ‘수담’으로 바꿨다. 수담(遂湛)에는 “드디어 새로운 것을 모으다”, “서로 말없이도 잘 통한다”는 뜻을 담았다.

수담(遂湛)은 “드디어 새로운 것을 모으다”, “서로 말없이도 잘 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선아 기자확대
수담(遂湛)은 “드디어 새로운 것을 모으다”, “서로 말없이도 잘 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선아 기자


에어컨 없는 창고에서 시작한 첫 납품, 그리고 버틴 시간


경주에서의 시작은 완전한 제로였다. 서울에서 쌓은 경력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기존 업체들이 오래 자리를 잡고 있는 시장이었다. 관공서에 전화를 돌리고 발품을 팔아도 쉽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업력이 짧고 실적이 없는 신생 업체를 불안하게 보는 시선이 뚜렷했다. 안 된다는 곳에 미팅을 잡아 얼굴을 알리고, 안 된다는 말을 또 듣고, 그래도 다시 전화를 걸었다.

 

2022년 5월, 전환점이 왔다. 제60회 경북도민체육대회 종사자 근무복 입찰을 따낸 것이다. 모자와 근무복 합쳐 3000벌, 첫 대형 오더였다. 남의 창고를 빌려 에어컨도 못 틀고 한여름에 땀을 흘리며 스티커를 붙이고 하나하나 포장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첫 대형 오더였으니까 힘든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그해 들어온 일은 그 한 건뿐이었다. 입찰마다 실적과 인원 조건이 걸려 있어 신생 업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공장 임대료와 인건비는 매달 빠져나가는데 들어갈 수 있는 건 자체가 없었다.

경주에 아무 연고가 없던 김 대표가 남편 지인의 소개로 발을 들인 곳이 여성기업인협의회였다. 당시 29살, 단연 막내였다. 위기의 순간 손을 내밀어 준 곳도 협의회였다. 그 상황을 알고 회장을 시작으로 회원들이 한 분 한 분 근무복 주문을 넣어줬다. 그 주문들이 모여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버티던 그해 10월,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자켓 납품 주문이 들어왔다. 기적 같았다고 했다.

이후 조금씩 실적이 쌓였다. 경주시체육회와 경상북도체육회 건을 따내고, 2023년에는 국가사업(ODA)으로 캄보디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스탄 산업협력 지원사업에도 참여했다. 2024년에는 군복 및 군용장구 제조판매업 허가를 취득하며 군납 시장에 진출했다. 양장기능사 자격증이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등록돼 있던 것이 기회로 이어졌다. 한번은 입찰에서 2등을 했는데 뜻밖에 연락이 왔다.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까, 어느 순간 문이 열리더라고요.” 2025년에는 경주시의회 표창패와 경주세무서 감사패를 받았다. 4년 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업체가 지역사회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김이본 대표는 퀄리티에 타협하지 않는다. 공장에 직접 가서 센치를 재고, 규격서에 나온 치수와 실제 봉제 치수를 대조하고, 맞지 않으면 다시 잡으라고 요구한다. 오선아 기자확대
김이본 대표는 퀄리티에 타협하지 않는다. 공장에 직접 가서 센치를 재고, 규격서에 나온 치수와 실제 봉제 치수를 대조하고, 맞지 않으면 다시 잡으라고 요구한다. 오선아 기자


센치를 재는 대표, 경주에서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꿈


김 대표는 퀄리티에 타협하지 않는다. 공장에 직접 가서 센치를 재고, 규격서에 나온 치수와 실제 봉제 치수를 대조하고, 맞지 않으면 다시 잡으라고 요구한다. 원단도 대구와 서울의 직조 공장에서 직접 생산한 것을 쓴다. 시장에 나와 있는 기성 원단보다 단가가 올라가지만 타협할 생각이 없다. 군납이나 맞춤복은 개개인의 치수를 재서 사이즈별로 제작한다.

 

“대충 넘기는 업체가 많아요. 저는 그게 안 돼요.” 직접 현장을 뛰며 몸을 쓰다 보니 어깨를 다쳤다. 1년째 재활 중이지만 쉬지는 않는다.

자체 생산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수담은 블랙야크, 밀레, 험멜, 스노우피크 등 의류 브랜드와 판권사용 파트너십을 맺고 있어 다양한 제품군도 갖추고 있다. 직접 만드는 것과 브랜드 제품을 함께 제안할 수 있는 것이 수담의 또 다른 강점이다.

지난해 경북 산불 때는 축제와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며 수주가 끊겼다. 한창 확장하던 시점이라 타격이 컸다. “사업하면서 정말 힘든 마음이 든다는 게 그때 처음이었어요.” 쉽지 않은 시기였지만 초록우산 경북지역본부를 통해 산불 피해 아동 가정에 1500만원 상당의 의류를 기부했다. “의류업체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지금 경주에 직접생산 유니폼 업체는 수담뿐이다. 그런데 지역 입찰은 같은 조건의 업체가 2곳 이상이어야 공고가 나온다. 유일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회가 막히는 현실이다.

그래도 김 대표는 멈추지 않는다. “언젠가 수담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자켓에 우리 로고가 들어가고, 매장에도 들어가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답이 돌아왔다. “쉽지 않아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하면 진짜 힘들어요. 저도 아직 그 과정 한가운데 있어요.”

전국 납품처를 다니며 그 동네 맛집을 찾는 게 유일한 낙이라는 김 대표. 심사위원 앞에서 제안 설명회를 하고 낙찰 소식을 듣는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고 했다. 서른셋, 김이본 대표와 수담은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더 기대된다.


저작권자 © 경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