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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이쑤시개 20개가 일군 ‘작은 기적’

박재우 기자 clmnpjw@hanmail.net 1722호 입력 2026/03/12 13:03 수정 2026/03/12 13:17
우리 경로당이 최고야 [23]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수지침 프로그램으로 봄날 감동 연출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문틈 사이로 계절의 훈기만큼이나 따뜻한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확대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문틈 사이로 계절의 훈기만큼이나 따뜻한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망부석 전설이 깃든 치술령 동쪽 자락, 돌이 많아 ‘돌거랑’으로 불려온 경주시 외동읍 석계(石溪)1리. 우수(雨水)와 경칩(驚蟄)의 절기가 이어지는 이른 봄,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문틈 사이로 계절의 훈기만큼이나 따뜻한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회원들이 수지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확대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회원들이 수지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망부석 전설 위에 흐르는 ‘돌거랑’ 마을의 새봄


경주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부인 김씨가 남편을 그리워하다 돌이 됐다는 치술령의 동쪽 기슭과 마주한다. 그 아래 유난히 돌이 많아 예부터 ‘돌거랑’으로 불렸던 마을, 석계가 자리 잡고 있다.

 

한때 벼농사와 600여 두의 소를 키우며 목가적인 풍경을 자랑했던 이곳은 100여 개의 공장이 속속 들어서며 활발한 산업지구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석계1리 평지마을과 양지마을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수백 년을 지켜온 당산나무와 30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여전히 마을의 안녕을 묵묵히 수호하고 있다.


환한 웃음을 짓는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회원들.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확대
환한 웃음을 짓는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회원들.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이쑤시개 20개가 전하는 보약보다 귀한 사랑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이상순 회장.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확대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이상순 회장.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석계1리 경로당에서는 최근 ‘작은 손이 주는 큰 건강’이라는 이름의 특별 프로그램이 열렸다. 값비싼 의료기기도, 화려한 보약도 아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쑤시개 20개와 고무줄이 전부였다.

 

이상순 회장을 필두로 어르신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쑤시개를 고무줄로 촘촘히 묶었다. 이렇게 완성된 ‘수제 수지침’은 어르신들의 거칠어진 손바닥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에는 온몸의 지도가 들어 있습니다. 돈 안 들이고 내 몸 내가 지키는 것이 진짜 효도 아닙니까.”

이 회장의 설명에 어르신들은 저마다 손바닥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 중앙은 간, 열 손가락 끝은 고혈압, 손바닥 가운데는 소화불량…. 전단지 한 장에 의지해 혈자리를 찾는 어르신들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최고령자인 94세 어르신이었다. 굽은 손가락으로 이쑤시개 침을 꼭 쥐고 한 곳 한 곳 정성껏 누르던 어르신은 “회장님, 이거 정말 일리 있는 말이네!”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흔을 넘긴 세월이 증명하듯 몸의 통증을 스스로 달래보려는 간절한 손짓에 곁에 있던 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거친 손등에 스며든 핸드크림, 그리고 눈물의 박수


수지침 자극으로 화끈해진 손바닥을 마무리한 것은 부드러운 핸드크림 마사지였다.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에, 돌 많은 석계 거랑에서 농사일을 하며 마디마디가 굵어진 어르신들의 손. 그 거친 손등에 향기로운 크림이 발라지자 경로당 안은 이내 꽃내음으로 가득 찼다.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마사지를 나누는 동안 어르신들의 눈에는 만족감을 넘어선 깊은 유대감이 서렸다. 프로그램의 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져 나온 우렁찬 박수 소리였다. 촉촉해진 손으로 치는 박수는 소리마저 맑고 청량했다.

이는 단순히 건강법을 배운 기쁨이 아니었다. ‘아직 내 몸을 내가 돌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홀로가 아니라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공동체의 온기가 빚어낸 감동의 하모니였다.



장수마을 석계, ‘돌거랑’ 전설은 현재진행형


석계1리는 예부터 산세가 좋고 물이 맑아 장수 어르신이 많기로 유명한 마을이다. 아흔을 넘긴 어르신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이번 수지침 프로그램은 단순한 소일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삶의 활력소로 자리매김했다.

 

이상순 회장은 “우리 석계리는 박제상 공의 부인이 새가 되어 숨었다는 ‘은을암’의 전설이 깃든 곳”이라며 “그 절개와 강인함이 우리 할머니들에게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공장이 들어서고 세상은 변해도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이 따뜻한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혈자리.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확대
혈자리. <사진=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작은 것이 주는 위대한 위로


수지침 혈자리가 인쇄된 전단지 한 장을 소중히 보관하며, 아픈 곳을 찾아 3초간 꾹 누르고 1초를 쉬는 그 정성스러운 손짓. “돈 안 들고 편리한 건강법으로 재미없는 생활이나마 건강하게 살자”는 이 회장의 소박한 외침 속에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진짜 이웃’의 온도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새봄과 함께 석계1리 어르신들의 손은 그 어느 해보다 촉촉하고 따뜻하다. 이쑤시개 20개가 만들어낸 것은 혈액순환만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단단히 잇는 고무줄 같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석계 거랑의 돌들이 오랜 세월 물에 깎여 둥글어지듯, 어르신들의 고단했던 삶도 경로당의 웃음 속에 서서히 둥글게 치유되고 있다. 외동읍 석계1리 할머니 경로당, 그곳에는 지금도 ‘작은 손이 주는 위대한 기적’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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