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곳곳에서 묵묵히 기업을 이끌어가는 여성 CEO들을 조명합니다. 경주신문은 2026년 특별기획 ‘경주를 움직이는 힘, 여성기업인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진솔한 경영 철학을 기록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섬세한 리더십과 뚝심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여성 기업인들의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께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경주신문은 지역 여성 기업인들의 제보와 추천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경주 교촌한옥마을, 천년의 시간이 머무는 이곳에 햇살과 바람을 품은 수백개의 장독대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미경전통식문화연구소’다. 한옥 마당을 가득 채운 옹기들 사이로 된장과 간장이 익어가는 냄새가 은근하게 번진다. “장을 담그는 건 자연을 이해하고 기다림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원미경 대표. “옹기 속에 경주의 시간과 제 삶의 결을 함께 담는다”는 그를 만났다.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이 장을 담그기까지
원미경 대표의 출발점은 장이 아니라 디자인이었다. 젊은 시절 가구 디자인을 전공하며 무언가를 손으로 만드는 일에 빠져 있었다. 나무를 깎고 형태를 잡는 작업이 좋았다. 삶의 터전이 경주로 바뀐 뒤에는 그 손이 다루는 재료가 달라졌을 뿐, 무언가를 빚어낸다는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환점은 가정의 밥상이었다. 시어머니의 장아찌와 장맛을 곁에서 보고 배우면서, 음식에 깃든 손맛과 절기의 감각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건너가는 것임을 알게 됐다. 수십가지 장아찌를 담그는 집안이었고, 장아찌 전용 냉장고가 따로 있을 만큼 일손이 많이 가는 살림이었다. 원 대표는 “설명을 듣기보다 직접 해보면서 익힌 것들이 몸에 남았다”고 했다.
원 대표에게는 건강 문제로 삶의 리듬이 크게 흔들린 시기가 있었다. 그는 그 시간을 멈춤이 아니라 정리의 시간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때부터 내가 해온 것들을 그냥 묻어두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록하고 체계를 잡아서, 다음 세대한테도 설명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결심은 국내외 현장과 학문의 영역으로 이어졌다. 원 대표는 대경대에서 조교수로, 경주대에서 한식 전임교수로 재직하며 전통 식문화를 학문과 현장 양쪽에서 다졌다. 해외 현장 경험도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2016년 오스트리아 린츠시에서 열린 브루크너 기념 국제행사에서는 주오스트리아 한국대사관의 요청으로 VIP 220명을 위한 한국 궁중음식 뷔페를 총괄했다.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과 KBS교향악단이 협연한 이 행사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도 참석한 자리였다. 낯선 환경에서 식재료를 구하고 조리 동선을 짜며 한국의 맛을 현지에서 직접 구현했다. 밤새 준비를 하느라 한국에 돌아와 보니 엄지발톱 두 개가 빠져 있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원 대표는 “현장에서 확인한 건, 가장 한국적인 맛이 오히려 세계 무대에서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외 현장 경험과 교육 경력을 바탕으로, 원 대표는 전통 장류의 식문화를 누구나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는 체계로 정리해왔다.
타협 없는 원칙, 그리고 세계로 향한 역발상
2019년, 원 대표는 교촌한옥마을에 연구소를 열었다. 대중에게 살아 있는 전통을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원 대표는 전통 장류의 본질을 변화에서 찾는다. “소금과 콩이 만나 발효되면 색과 향이 달라지는 게 당연합니다. 색이 변하지 않게 인위적으로 맞춘 건 제가 지향하는 전통과 다릅니다.” 소비자들은 노란 빛깔의 깨끗한 된장을 찾지만, 자연 발효된 된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갈변할 수밖에 없다. 그게 진짜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유통에서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방부제를 쓰지 않고 공정에서 타협을 줄이면 상온 진열 환경에서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형 유통매장이나 로컬푸드 매장 입점을 포기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는 “당장 편한 것보다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이라는 기준을 지키는 게 장류의 신뢰를 만든다”고 했다.
코로나로 체험 프로그램이 중단됐을 때, 원 대표는 운영 구조를 근본부터 손봤다. 온라인 판매 기반을 만들기 위해 통신판매업을 신청했고, 경주시 특산품 판매점에도 입점했다. 이어 경주시 해파랑 브랜드에 돌미역귀 장아찌와 건물가자미 장아찌를 출품해 선정되면서, 경주의 바다와 땅에서 나는 재료를 발효와 저장 기술로 풀어낸 지역 대표 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위기가 오히려 판로를 넓히는 계기가 된 셈이다.
대기업 중심의 공장형 장류가 시장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원 대표는 역발상으로 해외 시장을 두드렸다. 코로나 시기부터 중국 시장을 시작으로 수출 가능성을 살폈고, 경북경제진흥원 지원사업을 통해 장아찌류 홍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성과가 따랐다. 약고추장은 베트남·태국으로, 건물가자미 장아찌는 상해로 나갔다. ‘경주의 맛’이 해외 식탁과 만나는 접점이 생긴 것이다. 수출용 약고추장에는 남다른 비결이 있다. 비건 인구가 많거나 육류 반입이 까다로운 국가를 고려해 소고기 대신 말린 표고버섯을 넣었고, 대추 농축액으로 단맛을 더했다. 최근에는 주한 가나대사관과 협력해 ‘카카오 고추장’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쌉싸름한 카카오와 매운 고추장의 조합이라는 파격적인 시도다. 그는 “전통을 고수하되 고객과 시장을 향한 소통 방식은 계속 바꿔야 한다”고 했다.
“AI 시대에도, 장맛은 사람이 지켜야 합니다”
원 대표는 기술이 일상 깊숙이 들어온 시대일수록 ‘손으로 만드는 맛’의 가치가 더 분명해진다고 했다. “AI가 정보를 돕는 시대지만, 손끝에서 완성되는 장맛까지 기계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장을 담그는 일은 자연의 흐름을 읽고 시간을 기다리는 훈련이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장 담그는 일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 기업인들에게는 준비와 열린 마음,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것을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돌이켜보면 자신이 걸어온 길이 그랬다고 했다. 너무 힘든 고난이 올 때마다 ‘나에게도 최고의 순간이 올 거야’ 하는 기대로 버텨냈다는 것이다. “자기 분야에만 갇혀 있지 말고 세상을 넓게 보면, 전통도 더 단단해지고 새로운 길도 보입니다.” 지금도 혼자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다니며 감성을 채운다는 그의 말에서, 여전히 세상을 궁금해하는 사람의 태도가 읽혔다.
경주의 바람과 햇살이 머물고, 기다림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는 곳. 원미경 대표의 장독대는 그렇게 시간을 익히고 있다. 전통의 원칙은 지키면서 세계와 만나는 방식은 유연하게 넓혀가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장(醬)의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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