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한 펜션. 묵향 가득한 거실 한켠에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다. 도자기 표면에 소나무와 학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75세 노서예가는 반야심경을 새긴 항아리 작품으로 지난해 충무공 문화예술대전에서 입선했다. 놀라운 건 도자기에 글씨를 새기는 작업을 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도자기는 힘 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글씨의 구조를 알아야 각도를 맞춰서 새길 수 있거든요.”
1950년생인 정연관 서예가는 경주 토박이 3대째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이 땅에서 나고 자랐다. 정몽주의 후손인 영일정씨 포은공파 31세손으로 집안에는 대대로 이어져 온 서책들이 남아 있다. 특별한 건 그가 서예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글씨를 썼어요. 스승 없이 혼자 시작했죠. 할아버지가 남기신 서책을 보고, 중국 책을 구해서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롯데 본사 근무 시절, 그의 필적은 유명했다. 각 부서 현황을 정리할 때면 늘 그가 호출됐다. 차트를 그리고 글씨를 쓰는 일. 컴퓨터가 없던 시절, 그의 손끝에서 나온 보고서는 그 자체로 작품이었다.
군 복무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부대 현판, 표어판은 물론 벽화까지 그렸다. “타고났으니까 쉬웠죠. 그래서 오히려 소중함을 늦게 깨달았습니다.”
은퇴 후 그는 본격적으로 붓을 들었다. 초서, 행서, 해서를 넘나들며 한국화, 유화, 서각까지 섭렵했다. 거실 벽면에는 90년대에 그린 유화 작품들이 걸려 있다. 아내와 아이들을 그린 가족 초상화다. 주변에서는 “글씨와 그림, 서각을 함께 하는 작가는 보기 드물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본인은 “그저 좋아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혔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지금 그가 집중하는 작업은 고시조 해석본이다. 우리나라 옛 시조 200여 수를 모아 한문 원문을 초서로 쓰고, 각 시마다 직접 그린 그림을 삽입한다. 현대어 해석까지 덧붙여 젊은 세대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작업이다.
“한문을 모르면 우리 시가의 진짜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번역도 사람마다 달라서 원뜻이 왜곡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직접 초서로 쓰고 풀이를 달아서 책을 내려고 합니다.”
황진이 시에는 기생집 풍경을, 안중근 의사 관련 시에는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시의 분위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오랜 숙련으로 작품의 분위기가 손에 익으면 붓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시를 읽고 느낌이 오면 그대로 표현하는 거죠.”
컴퓨터 작업도 독학으로 배웠다. 워드로 타이핑하고, 레이아웃 잡고, 목차 만드는 일까지 혼자 해낸다. 아들이 가끔 도와주지만 대부분은 손수 한다.
최근 그의 재능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대한민국문화예술대전 동상, 충무공숭모예술대전 한국자유총연맹총재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오는 3월 2일에는 서울 종로구 마루아트센터 특별관에서 시상식과 전시회가 열린다.
“상 받을 생각 없이 그냥 권유받아서 출품했어요. 주변에서 권해주셔서 용기를 냈는데, 이렇게 좋은 결과를 받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작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생활은 단순하다. 현재는 펜션을 운영하며 틈틈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고시조 해석본 출판도 준비 중이지만, 그림과 글씨가 함께 들어가는 특성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시간이 걸린다.
“이 나이에 서둘러서라도 남겨야죠. 젊은 사람들이 우리 옛 시가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거실 벽면 가득 걸린 작품들. 90년대 유화부터 최근의 서예 작품까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서책들.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70평생 예술혼을 증명한다.
“제 목표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우리 옛 것을 제대로 남기는 거죠. 한글도 결국 한문에서 나왔으니까 뿌리를 알아야 진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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