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개최지로 경주시가 최종 확정됨에 따라 경북도와 경주시가 본격적인 회의 준비에 착수했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지난달 27일 도청에서 ‘2025 APEC 정상회의 개최도시 경북 경주 선정’ 브리핑을 열고 역대 최고의 성공적인 대회가 되도록 행정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이날 오전 2025 APEC 정상회의 준비위원회는 외교부에서 회의를 가진 뒤 경주시를 APEC 정상회의 개최도시로 최종 확정했다. 경주시와 함께 정상회의 개최 후보 도시로 선정됐던 인천, 제주 등엔 APEC 장관회의 및 고위관리회의 등이 각각 분산 개최될 전망이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주요 시설 확충 및 개보수 등을 추진하고, APEC 지원 준비단 발족과 분야별 실행계획 수립 등 준비작업에 착수키로 했다. 정상회의가 열리는 보문관광단지 내 화백컨벤션센터 회의시설 등을 보강하고 보문관광단지 진입로와 주변 환경도 정비할 계획이다. 정상들의 오·만찬과 문화행사 등을 위한 각종 서비스 시설을 개선하고 수송과 교통 서비스 인프라도 확충한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이러한 실행계획을 수립해 세부 과제를 외교부 APEC 준비기획단과 협의해 추진할 계획이다. K-콘텐츠의 글로벌 위상을 강화하고, 글로컬 K-관광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경북연구원, 경북문화관광공사, 경주하이코 등 유관기관과 협력해 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한 체계적인 홍보마케팅에도 나설 방침이다. 대구·경북권 경제계와 기업들도 APEC 정상회의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경북상공회의소협의회,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대구경북지원단, 한국무역협회 대경지역본부, 경북수출기업협회 등 경제단체도 대구상공회의소와 협력해 수출 홍보에 힘쓰기로 했다. 이철우 도지사는 “이번 개최도시 선정은 지역의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풍요로움, 그리고 시도민의 열정과 노력이 만들어 낸 쾌거”라며 “1500년전 세계 4대 도시였던 경주가 다시 한번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시·도민이 모든 역량을 함께 모아 역대 가장 성공적인 APEC 정상회의로 개최하겠다”고 말했다. 주낙영 시장은 “이제 경주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새로운 전기를 확실히 마련했다”며 “이 놀라운 성과는 25만 경주시민과 260만 경북도민, 그리고 경주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과 지지 덕분이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방시대 지역균형발전 가치 실현을 위해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APEC 개최도시선정위원회외 준비위원회에 시민을 대표해 환영과 감사말씀을 드린다”며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정상회의 개최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 4급 승진 및 전보 △고현관 맑은물사업본부장 △윤병록 북경주행정복지센터장 △김기호 시민복지국장 △백승준 농축산해양국장 ■ 5급 전보 △손기복 홍보담당관 △김대학 정책기획관 △이석훈 미래전략실장 △서은숙 관광컨벤션과장 △공재경 체육진흥과장 △유용숙 경제정책과장 △김종대 기업투자지원과장 △최..
제9대 경주시의회 후반기 의장에 이동협 현 부의장이 선출됐다. 부의장에는 임활 현 행정복지위원장이 당선됐다.
경주시가 2025년 제3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최종 선정됐다.외교부 APEC 정상회의 준비위원회는 27일 오전 청사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서 경주시를 APEC 정상회의 개최도시로 확정했다. 지난 20일 개최도시 선정위원회가 제4차 회의에서 경주시를 개최도시로 건의한 것을 이날 회의에서 수용..
한지에 담은 염원 손톱만한 크기로 찢어낸 한지를 하나하나 붙이고, 그 위에 다시 붙이는 무한 반복의 작업을 통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그리고 나만이 공존하는 침묵의 시간이 주는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작은 손짓으로 염원을 담는다. 너무 매끄럽지 않게, 그렇다고 투박하지 않게 표면을 표현하려했다. 때로는 더 높은 곳으로, 때로는 낮은 곳으로, 해와 달, 구름과 어우러져 더 힘차게 자유롭게 천마도가 달려가길 바랐다. 한 겹의 한지는 그 자체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또 다른 한 겹과 만나 무한히 반복되며 그 무엇보다 견고하게 완성된다. 우리의 삶도 한지처럼 편안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단단함이 함께하길 바란다.
경주시가 내년 11월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도시로 최종 선정됐다. 외교부 APEC 개최도시 선정위원회는 지난 20일 회의를 열고 경주를 비롯해 인천, 제주 등 3개 도시에 대한 심사 결과 압도적인 표를 얻은 경주를 개최지로 의결했다. 선정위원회 위원 17명 가운데 13명이 투표를 통해 경주를 선택한 것이다. 외교부 장관 주재의 APEC 준비위원회는 27일 이 같은 건의를 받아들여 최종 확정한다. 지방자치단체인 경주가 광역단체 2곳을 제치고 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된 것은 신라 천년 역사를 간직한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는 강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실제 외교부가 20일 배포한 자료에서도 경주시는 국가 및 지역 발전 기여도, 문화·관광자원 등에서 우수성을 보유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고 했다. 경주시가 APEC이 지향하는 포용적 성장과 정부 국정철학인 지방균형발전을 극대화할 수 있고, 신라 천년의 문화를 보유한 역사문화관광도시임을 강조한 것이 이번 심사에서 주효했다. 경주가 2025 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된 소식이 전해지자 지역 곳곳에서 축하 현수막을 내거는 등 자축하며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APEC 정상회의는 내년 11월 열린다. APEC 정상회의는 미·일·러·중 세계 4강을 비롯해 태평양 연안 21개국 정상과 각료, 언론인 등 6000여명 이상 방문하는 매머드급 국제행사다. 참가 21개국 인구는 약 30억만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40%에 해당하며, GDP는 61.5%, 교역량은 50.4%를 육박하는 세계 최대 경제협력체다. 이에 따라 지난 2005년 부산에 이어 20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내년 정상회의는 역사문화의 보고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경주의 역사문화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경북연구원에 따르면 내년 정상회의 개최로 9720억원의 생산유발효과와 4654억원의 부가가치 유발, 7908명의 취업 유발 효과 등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경주가 국내와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관광지로 도약하는 마중물이 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기대감은 더욱 높다. 정상회의가 열릴 보문관광단지는 5성급 호텔과 경주화백컨벤션센터 등 회의 시설이 일정 수준 갖춰져 있다. 회의장과 숙박시설, 전시장 등이 3분 이내 거리에 모든 인프라가 집적돼있어 원활한 회의 진행이 가능하다. 특히 정상경호와 보안 측면에서도 최적의 장소다. 대구국제공항과 김해·포항경주공항, 울산공항도 50분대 거리에 있어 정상들의 이동에도 무리가 없다. 게다가 울산공항을 제외한 3개 공항이 민간·군사공항이어서 의전과 경호에 있어 최적의 상황을 구현할 것이다. 특히 도심에 산재한 왕릉과 동부사적지, 불국사를 비롯한 역사를 간직한 찬란한 유적지들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내년 APEC 정상회의 개최까지는 이제 1년 4개월 정도 남았다.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앞으로의 준비 기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각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회의인 만큼 주 회의장인 경주화백컨벤션센터 정비를 비롯해 전시관 증축사업 등도 마무리해야 한다. 또 보문관광단지 전역에 대한 정비도 서둘러야 한다. 정상과 각료 등이 머물 숙소 역시 보완해야 한다. 철저한 준비를 위한 시간은 결코 넉넉하지 않다. 성공적인 APEC 정상회의 개최를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고, 경북도와 경주시의 치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경주는 지난해 9월 APEC 정상회의 경주유치 100만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서명운동 전개 결과 불과 85일 만에 25만 경주인구 보다 약 6배 많은 146만3874명이 서명하면서 경주시민, 경북도민을 넘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경주시민들의 유치 염원이 이뤄낸 결과였다. 이 같은 시민 염원은 이제 정상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손님들을 친절하게 맞이할 수 있는 선진 시민의식으로 전환돼야 할 때다. 천년고도의 역사문화에 걸맞은 시민의식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APEC 정상회의 경주 개최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마음 졸이며 유치에 성공한 만큼 전 시민들이 지혜를 모아 정상회의 성공개최를 이끌어야 한다. 경주가 단순 과거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지의 명성이 찾는 것이 아니라 한류를 타고 세계인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관광지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살릴 수 있길 기대한다.
지난 6월 초, 영국의 리시수낙(Rish Sunak) 총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D-day 행사 기념식에 불참하고 자국의 총선 지원 후 이른 시간에 영국으로 돌아온 사실을 두고 보수당의 당수이자 영국 수상으로서의 위치를 망각한 처사라며 강력히 비판받고 있다. 6월은 유럽이나 우리나라에 있어서 호국보훈의 의미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슬라이고는 유럽 최초의 한국인 공장 ‘새한미디어’가 1990년대 초부터 공사를 시작, 공장 가동 3년 후 1억 불을 달성하는 등 15년간 번창하다 미디어 환경변화로 2007년 회사는 문을 닫았었다. 이후 약 15년 동안 방치하다 현재는 미국계 주류회사(Sazerac distillery Ltd.)가 인수하여 영업하고 있으며 현재 400여명의 고용 창출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바 있다. 지난 6월 중순 조용한 시골 마을 슬라이고에는 충남 계룡시 소재 아무르 브라스 앙상블과 슬라이고 합창단(Sligo Orpheus Choir)의 합동공연이 울려 퍼졌다. 이 행사는 올해 1월 초 필자가 다니는 교회 ‘Carly Parish Church’ 건축 200주년 행사를 맞아 나의 아일랜드 친구인 레이몬드(Raymond Carty, 78세, Sligo Orpheus Choir의 전 회장)에게 협연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다행히 내가 협연을 제안한 공연팀이 해군군악대가 주축이 된 밴드라는 사실만으로도 예상 밖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아일랜드는 이민의 역사가 깊다. 약 750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 이민(Irish Diaspora)은 19세기 중반 극심한 감자 기근으로 촉발되었으며 주로 미국, 영국, 호주 등에 분포되어 있다. 6.25 발발 당시 많은 아이리쉬들은 해당 국가의 시민권을 획득할 요량으로 미군 또는 영국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였으며, 전사자만 130여명에 이른다. 합동 연주회를 홍보할 목적으로 지역방송인 Ocean FM 방송에 참전용사를 찾는다는 방송을 했다. 이에 10여명이 방송국 또는 합창단 관계자에게 연락해 왔다. 그중 한 사람이 미군 간호장교로 6.25에 참전했던 아넷 대위(Captain Annette O’Connell Herlihy)다. 아넷 대위의 조카 파이델마(Fidelma Flynn)는 늘 자상한 자신의 고모가 늘 삶의 롤모델이 돼 주었다고 회고하며 그녀가 7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2010년 100세의 나이까지 장수하다 영면, 가족 묘지에 모셨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아넷 대위는 1950년부터 3년 간 미육군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과 많은 시민들을 치료했고 제대 후 미국 아틀랜타 주의 적십자사 직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모인 사연 중 가슴 아픈 사실도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 신부들이 6.25 전쟁 초기 남침한 북한군에 의해 공개 처형된 사실(史實)이다. 이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이 섬기던 성당에서 믿음을 지키다 남침한 공산당에 의해 처형되었다. 사망한 신부의 대부분은 1950년 6월 말에서 9월 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남침하는 공산당의 총부리에 맞서 피난도 가지 않고 자신들의 사역지에서 흔들림없이 믿음(faith)을 지키다 순교한 분들이었다. 합동 연주회가 끝나고 중년의 여성 잭클린(Jacqueline Nee creaven) 씨가 필자와 아내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내년 5월 그 신부들의 친지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순교한 성 콜롬반 신부 일곱 분들이 일한 곳과 투옥 또는 사망하여 묻힌 곳을 직접 찾아가는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행사를 위해 필자에게 혹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만약 이들을 도울 방법이 생긴다면 내년 이맘때면 우리에게 친숙한 Dannyboy, Salley Garden 등 아일랜드의 음악을 한국인과 아일랜드인들이 하나가 되어 연주할 유쾌한 상상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이번에 열린 합동공연은 여러 가지 돌발변수에 예산 문제, 양국 간 문화의 차이 등을 고려하면 도저히 진행할 수 없었다. 아무르 밴드 단원들의 나라 사랑 정신과 초청자 측인 Orpheus Choir, Raymond 등의 아낌 없는 지원, 그리고 무엇보다 필자 아내의 보이지 않는 응원,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쪼록 양국의 교회 등 관심을 가지는 단체들과 문화를 통해 서로의 다음 세대가 교류하기 바라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일곱 신부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바란다.
학생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젊음을 바친 경주지역 학도병들을 기리는 전시회가 오는 8월 31일까지 경주문화관 1918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경주 학도병 기록물 전시회’로 지난 25일 이곳에서 개막식을 가졌다. 전시회는 경주교육지원청이 지역 출신 학도병들의 희생과 용기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특별기획했다. 이곳 전시장에는 6.25전쟁 당시 각종 문서와 사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비롯해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인터뷰 영상 등을 만날 수 있다. 전시회 기획은 경주교육지원청이 학적부에서 졸업하지 못한 학도병들의 흔적을 찾으면서 비롯됐다. 중요기록물 전산화 사업을 하던 중 완성되지 못한 학적부가 다량 발견됐고, 이를 확인해보니 학도병이 참전 후 돌아오지 못했거나 종전 후 나이가 들어 생업에 종사하면서 졸업하지 못했던 것이 확인됐다. 이에 지난해 생존하는 학도병 인원 파악과 사전 인터뷰를 했고, 올해는 관련 자료를 모았다. 지난 3월에는 경주 학도병 기록물 수집 및 전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경주교육지원청은 이번 전시회 이후에도 향후 경주 출신 생존 학도병에 대한 구술을 추가로 채록하고, 영상 제작, 순회 전시 등을 통해 학도병을 기억하는 방안을 마련한다고 한다. 학도병들의 희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고, 또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생존해 있는 이들의 나이가 90세를 넘기면서 건강을 잃거나 생활고를 겪는 이도 많다. 또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통계에 잡히지도 않아 복지사각지대에 남아 있거나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경주교육지원청의 차원을 넘어 국가보훈부, 경주시가 나서 찾지 못한 학도병들의 현황과 실태를 파악하고 지원까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생존자가 줄어들면서 점점 잊혀가는 학도병들의 희생정신이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널리 확산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해 농사의 마무리는 영농폐기물을 수거하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농사를 위해 사용 후 버려지는 폐비닐이나 폐플라스틱, 농약병 등 영농폐기물을 수거해 올바른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첫걸음이다. 하지만 농사철 농경지 곳곳에 폐비닐이나 농약병 등 영농폐기물이 쌓여 있는 곳이 많다. 풀이 나지 않도록 설치한 멀칭용 비닐과 각종 플라스틱 농약병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흔히 목격된다. 이 같은 영농폐기물 수거를 위해 경주시와 농촌지도자회가 지난 2020년부터 농촌정화활동을 하고 있다. (사)한국농촌지도자 경주시연합회는 지난 25일 18개 읍면동 지회에서 수거한 영농폐기물을 현곡면 DSC에 공동 집하한 뒤 농약병과 농약봉지로 분리 계량해 한국환경공단 포항수거사업소에 납품했다. 납품된 영농폐기물은 플라스틱병 기준 ㎏당 환경공단 1600원, 경주시가 800원의 수거보상비를 각각 지급한다. 지난 2022년부터는 수거보상비를 인상하면서 수거량도 크게 증가했다. 경주시에 따르면 이 단체가 수거 활동을 시작한 2020년 2.5톤, 2021년 4.3톤, 2022년 6.7톤, 2023년 11.2톤 등 매년 수거량이 증가하고 있다. 매년 수확이라는 기쁨 뒤에는 많은 양의 영농폐기물이 배출되기 마련이다. 수거되지 않은 영농폐기물 대부분은 불법 소각되거나 생활폐기물 등과 섞여 매립되기도 한다. 비닐 같은 영농폐기물은 무단 소각 시 대기오염을 유발한다. 또 지정되지 않은 땅에 임의로 묻을 경우 자연분해가 되지 않아 토양 및 지하수 오염을 일으킨다. 허술한 영농폐기물 관리는 환경오염 등을 초래하는 고질적인 농촌 문제로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 영농폐기물이 수거되지 않는 주된 이유로는 농업인구 고령화와 일손 부족 등이 손꼽힌다. 이 같은 이유로 영농폐기물을 지정된 장소에 배출하는게 어렵다보니 완전 수거 및 처리가 어렵다. 그나마 한국환경공단과 지자체가 영농폐기물을 수거해오면 보상금을 지급하는 수거보상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보상금 지급만으로 영농폐기물 문제를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다. 영농폐기물을 체계적으로 수거·처리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관리계획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 그리고 영농폐기물을 스스로 수거하는 농민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 교육과 홍보도 필요하다. 여기에 예산과 인력 확충 등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이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다.
강동면 왕신리에 자리한 운곡서원(雲谷書院)은 정조 8년(1784)에 유림의 공의로 안동권씨 권행(權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1403~1456)와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1529~1573)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권행은 본래 김씨였으나 고창군 병산전투에서 백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여 식읍(食邑)과 안동 본(本)을 받았다. 단종(端宗)의 이모부인 권산해는 1453년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고, 권자신(權自愼),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옥에 갇히자, 하늘을 우러러 눈물 흘리며 “이것이 참으로 하늘의 뜻인가”하고는 마침내 높은 누각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54세에 자살한 충절의 인물이다. 하지만 이 일로 자손들은 백 년 동안 벼슬길이 막혔지만, 훗날 후손인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1745~1819)과 여러 선비의 상언(上言)으로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1789년 관직 회복과 1791년 이조참판, 1885년 이조판서 등 증직(贈職)된다. 동생인 향일재(向日齋) 권수해(權壽海,1410~1466) 역시 사육신 일과 연루되어 연일로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청안이씨 이유미(李裕美)의 따님과 혼인하며 정착해 가계를 이룬다. 권덕린은 회재 이언적의 제자로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을 따랐다. 스승은 숙부의 따님을 사위로 삼았는데, 권덕린의 부인은 회재의 작은 아버지 이필(李苾)의 따님으로 회재와는 종매(從妹) 간이다. 이필은 이번(李蕃,1463~1500)의 차남으로 4남 3녀를 두었는데, 최덕숭(崔德崇), 권희범(權希範), 권덕린을 사위로 삼았다. 스승이 유배 가자 안강 양월리 귀성(龜城:구성) 아래에 구봉서사를 짓고 더욱 글을 익혔다. 그는 1553년에 문과급제를 시작으로 예조정랑, 회덕현감, 하동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노모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를 맡았으며, 1571년 지역의 유림과 옥산서원 창립을 도모하였으나, 안타깝게도 45세 병을 얻어 타계하였다. 두류골에 묘소가 있다. 앞서 임자년(壬子年,1732) 5월에 서면 운대리에 운천향현사(雲泉鄕賢祠)를 창건해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 귀봉 권덕린을 배향하면서 경주에 안동권씨 사당건립이 본격화되었다. 『운곡서원지』에 의하면 1784년 5월에 영해 권씨 종중에서 권중령(權重齡) 등 85인이 시조의 고향에 사당을 세우려 하였고, 동도(東都)에서 영기(靈氣)가 모이는 달천서당과 운천(雲泉) 두 곳을 예정지로 논의한 결과 예로부터 집안사람이 공부하던 운천에 사당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숭모사업 건립에 박차를 가한다. 파평윤씨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1741~1826)는 『무명자집』에서 1789년에 죽림 권산해가 벼슬을 추증받은 것을 축하하며 지은 시에서 “사당 앞 은행나무에 새잎이 돋아나고, 저 멀리 자규루(子規樓)에 달빛이 비치네(祠前鴨樹抽新葉 遙帶子規樓月痕)”라며 읊조렸으며, 현재 운곡서원의 남쪽에 우뚝한 은행나무는 오랜 역사를 기억한 채 깊은 산속에서 인기척을 바라며 서 있다. 이는 권종락이 순흥(順興) 금성단(錦城壇)의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다 심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순흥(順興) 읍내에 은행나무[銀杏樹]가 있었는데, 가지와 잎이 수 리(里)에 뻗었었다. 단종 때 갑자기 말라 죽어, 점을 쳐보니 “압수(鴨樹)가 다시 살아나면 흥주(興州)가 회복될 것이다”라 하였다. 은행나무의 이름이 압각수(鴨脚樹)이고 흥주는 곧 순흥(順興)이다. 당시엔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얼마 뒤에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화를 당했을 때 흥주를 폐지하고 풍기(豐基)에 소속시켰다가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흥주도 복권되었다. 몇 해 전부터 마른 밑동 아래에서 홀연 싹이 나기 시작하더니 날로 무성해졌고, 뿌리가 퍼진 곳은 모두 떨기로 싹이 터서 숲을 이루었으니,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죽림공이 복작(復爵)된 뒤에 후손 권종락이 이 은행나무 밑을 지나다가 축원을 올리고 그 가지 두 개를 베어서 갔다. 순흥에서 경주까지 거리가 400여리나 되고 권종락의 행보도 마침 우회하여 한 달 만에야 운곡사에 도착하였다. 권종락이 그 가지를 보는데 결대로 갈라지고 껍질이 벗겨져 생기가 없었다. 이에 사당 앞 땅에 꽂자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얼마 뒤에 과연 살아나서 3년이 지난 지금 사뭇 무성해졌다고 한다. 중국의 고사에 송나라 내국공(萊國公) 구준(寇準,961~1023)이 뇌주(雷州)에서 죽어 고향인 서경으로 운구될 때 공안현(公安縣) 백성들이 모두 길가에 나와 대나무를 잘라 땅에 꽂고 지전(紙錢)을 매달아 곡하였는데, 한 달 뒤에 대나무에 순이 모두 돋았다. 그리고 강원도 영월 객관 북쪽의 자규루(子規樓)는 본래 매죽루(梅竹樓)였으나,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이 누각에 올라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들은 일로 누각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늦게나마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권산해의 복작에 이어 단종의 한이 서린 자규루 옛터도 비슷한 시기에 중건되었으니 역사의 아픔이 조금은 해소되는 듯하다.
천 번의 호미질, 만 번의 붓질. 땅속의 영웅들을 찾는 손길은 조심스럽다. 열 밤만 자고 돌아온다던 아비가 딸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새색시를 두고 얼른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새신랑이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아들의 생환을 마지막까지 기다린 부모의 묘지로 아들이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7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70여년. 어수선한 전장에서 유해마저 챙기지 못한 이들이 많다. 수많은 전장이 한반도 곳곳에 있었고 미처 챙기지 못한 주검이 세월의 흐름 속에, 땅속에 잠들어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아줌마가 10년 넘게 지원하던 해외아동 결연 아이가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후원이 중단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아동과 새롭게 결연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지원단체에서 혹시 원하는 나라가 있느냐란 물음에 ‘에티오피아’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아프리카에서도 한국전에 참전했고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것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순간 들었나보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6·25를 잘 모른다. 2002 월드컵 3, 4위전에 만난 터키가 참전국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머나먼 아프리카에서도 참전했다는 것을 몰랐다. 우연히 본 프로그램이나 책 몇 권이 전부다. 나라마다 사정이 있고 국제정세에 따른 지원이 있었을지언정,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희생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작년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유해 발굴 작업 중에 ‘경주중학교’ 배지를 발굴했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포항과 경주에서 학도병들이 지원했고 사진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유해의 가족을 찾았을까? 70년이다. 유해를 찾아도 가족의 유전자 자료가 없으면, 유해의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다. 대다수의 유해가 포탄으로 인해 뼈 일부분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으스러지고 깨진 조각으로만 남은 유해로 그들의 신분을 찾을 수는 없지만, 유전자 정보는 찾을 수 있다. 남은, 생존 가족들의 유전자 정보로 인해 유해의 신분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2000년부터 시작된 유해 발굴 작업. 다행히 경주시는 유가족 찾기 지원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서 작년에 표창까지 받았다니, 아줌마는 뿌듯하고 다행이다 싶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지 않는가! 유월이다. 일 년의 한 달은, 이 땅에서 수없이 많은 피가 뿌려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아흔이 넘은 한국전 프랑스 참전용사가 전우들이 있는, 제2 고향 대한민국에 묻히고 싶다고 한다.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들은 모두 전사했다. 2021년 칠곡의 한 초등학생이 미 엘리엇 중위의 유해를 찾아달라며 편지를 썼다. 호국의 다리에 있는 추모비를 통해 엘리엇 중위의 유해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칠곡 군수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는 복사되어 칠곡 유해발굴 담당 장병들의 지갑 안에 담기게 되었으며 미 엘리엇 중위의 가족에게까지 알려진다. 그리고 올해 칠곡의 한 어린이집 친구들이, 올해 유해가 발견되어 가족의 품에 안기게 된 김희정 중위를 추모하는 편지를 유가족에게 보낸다. 관심이 관심을 부르고, 선한 영향력이 사회를 물들인 아름다운 사례다. 무더운 유월. 유해발굴감식단과 군인들은 오늘도 삽과 호미, 붓을 들고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뼛조각 하나를 발굴하기 위해 천 번의 호미질과 만 번의 붓질을 한다. 그들이 땅속의 영웅을 마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잊혀진 영웅을 기억하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은 과거의 전장을 돌며 땅속의 영웅을 찾는다.
‘러시아 5인조’에는 19세기 중반 서유럽 음악을 하는 러시아 주류 음악계가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민족주의 음악가 5명을 통째로 얕잡아 보는 뉘앙스가 들어있다.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바로크(baroque)’나 빛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그림에 담은 ‘인상파(impressionism)’도 원래는 이들 유파를 비꼬는 투의 부정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바로크나 인상파가 이런 부정적인 위상을 극복하고 후대의 재평가를 받아 위대한 예술 유파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러시아 5인조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그들도 ‘5인조(패거리)’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과감히 받아들인 후 음악사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혁혁한 성과를 낸 것이다. 5인조 멤버는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1837-1910),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 세자르 큐이(César Cui, 1835-1918), 알렉산드르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 그리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다. 연배로 딱 중간에 위치한 밀리 발라키레프가 리더 역할을 했다. 러시아 5인조의 역사는 1856년 발라키레프와 큐이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에 무소륵스키가, 1861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862년에 보로딘이 합류하면서 완전체가 된다. 이때 막내인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살에 불과했고, 최연장자인 보로딘 조차도 29살이었으니 매우 젊은 음악가 단체가 탄생한 것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이다. 직업(전공) 역시 다양하다. 발라키레프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보로딘은 화학을 전공하여 화학자로도 활동했다. 큐이와 무소륵스키는 육군장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였다. 서유럽 음악에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은 러시아 고유의 선율을 찾아 자신들의 독창적인 민족주의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이들 중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친 음악가를 뽑으라면, 그룹의 막내뻘인 무소륵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될 것이다. 둘 다 오페라와 관현악에 모두 능했다. 특히 1871년 27세의 나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악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넘어서는 관현악 작곡 기량을 선보였다. 러시아 5인조는 동시대의 천재 차이콥스키와 협조와 반목을 거듭하면서 성장해갔다. 미하일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가 물꼬를 튼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계승하여 세계적인 입지를 확보한 것은 그들의 큰 공적이다. 그리고 그 공은 보물 같은 후배 작곡가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 1906-1975)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사)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는 지난 24일 전직원을 대상으로 인권침해 사전예방 및 재발방지를 위한 직원교육을 실시했다. 인권침해란 인권 또는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폭언, 폭행,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성폭력을 포함해 사람의 권익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이날 교육은 폭언·폭행·상해 행위 시 대응방법, 성희롱, 성폭력 대응방법,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진행했으며, 괴롭힘 예방 및 대응방안도 교육했다. 이동균 사무국장은 “노인회 지회의 인권 향상과 노인복지증진에 기여하는 직원들께 감사하다”며 “교육을 통해 직원 모두가 인권감수성 향상을 위해 서로 존중하고 상호배려 하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는 지난 18일 사례관리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영역에 있어서의 개입방안 및 역할에 대한 역량강화 교육을 실시했다.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는 2012년부터 통합사례관리 구축을 위한 민·관 네트워크 형성에 힘써왔다. 단순 자원연계에서 나아가 대상자의 복합적인 문제에 다각적으로 접근해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또 각종 재난, 코로나 등을 비롯해 최근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 따른 정신건강영역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가 사례관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보다 심도 있는 탐구도 진행하고 있다. 교육은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현진희 교수가 정신건강영역에서의 사례관리 개입 방안이라는 주제로 실천대상별 이해와 개입방법에 대해 강의했다. 이어 양지드라마심리상담센터 이형진 센터장과 함께 △역할극을 활용한 사례관리 -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방안 탐색을 위한 다양한 사례들을 공유하고 표현함으로써 대상자와 사례관리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 박경복 회장은 “다양한 복지수요, 환경, 특히 정신건강영역에 있어서의 편견이나 낙오감이 생기지 않도록 전문적인 역량강화를 통해 사례관리의 효과적인 접근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는 지역 내 민·관 사례관리 실무자들을 위한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소진을 예방하고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복합적인 욕구를 가진 대상자에 대해 통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주엑스포대공원이 특별 연간 행사를 통해 지난해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경북문화관광공사는 경주엑스포대공원에서 29일 새로운 브랜드 콘서트 1탄 ‘EXCON - HIPHOP DAY’를 시작으로 특별 연간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먼저 여름 시즌 이벤트로 8월 한 달간 워킹스루 호러 ‘루미나 호러나이트’의 업그레이드 버전 ‘EX HORROR’를 선보인다. ‘EX HORROR’는 새로운 스토리와 연출은 물론, 코스를 전면 재단장한다. 지난 3년간 루미나 호러나이트를 즐겨온 체험객도 새로운 기분으로 오싹한 여름밤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다. 또 더 강한 자극과 공포를 원하는 체험객들을 위해 지난해 호평을 받은 ‘야외에서 즐기는 실내 호러 시설’을 확대 설치한다. 가을 시즌에는 경주엑스포대공원 최고 인기 이벤트인 ‘루미나 해피할로윈’이 ‘EX HALLOWEEN’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호박과 장식 조명으로 환상적으로 연출된 화랑숲을 걷다 보면 다양한 할로윈 캐릭터들이 체험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실시간 코스 안전 CCTV 모니터링으로 군중 밀집을 방지하고, 구역별 안전요원 배치를 통해 안전한 체험이 되도록 할 예정이다. 10월 12일, 13일에는 ‘2024년 반려견 페스티벌’이 화랑광장에서 펼쳐진다. 이 행사는 반려인구 증가에 따른 성숙한 반려동물 문화 조성과 천연기념물인 토종개의 가치 제고를 위해 마련됐다. 반려견 교감 스포츠 놀이터, 토크 콘서트, 영상 및 사진 콘테스트, 교육 프로그램 등 반려견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맞춤 콘텐츠가 진행된다. 11월 9일에서 11일엔 실크로드 문화권 국가들의 면 요리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K실크로드 누들 페스티벌(가제)’이 열린다. 행사장은 K실크로드 누들 컬쳐존, K실크로드 푸드 트럭존, K실크로드 전통 게임존으로 구성된다. 중국의 뱡뱡면, 일본의 하쿠타쿠 우동, 아제르바이잔의 Yarpag Khengeli 등 다양한 식문화 체험을 통해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고, 동서양 문화 화합의 장으로서 경주의 위상을 되살린다는 방침이다. 한편 공사는 지난 5월 일본 최대 한류 이벤트 KCON 공식 파트너 출점을 시작으로, 7월 신비아파트 경주엑스포대공원 애니메이션 방영 등 다양하고 적극적인 홍보도 전개할 계획이다. 김남일 사장은 “경주엑스포대공원만의 매력을 알고 자주 찾아올 수 있도록 더욱 새롭고 알찬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힐링하고 솔거미술관, 경주타워, 인피니티 플라잉 등 다양한 콘텐츠도 즐기며 기억에 남을 멋진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
남산을 맞잡고 자리 잡은 도당산 아래로 간다. 신라시대 귀족은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령지라는 신령스러운 장소를 정해두고 돌아가며 했다. 도당산은 사려지 중 한곳으로 보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도당산 아래 일대는 논이었다. 어느 해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옛 절터 천관사 터(사적 제340호)라 했다. 지금은 논을 메우고 탑을 세워 절터를 복원해 놓았다. 천관사(天官寺) 寺號天官昔有緣 (사호천관석유연)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홀문경시일처연)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다정공자유화하) 술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함원가인읍마전)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홍렵유정환식로)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창두하죄만가편) 종놈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유여일곡가사묘)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섬토동면만고전)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파한집》, 이공승(李公升, 1099년(숙종 4)~1183년(명종 13), 고려 문신, 직한림원, 어사중승, 한림학사, 중서시랑평장사) 김유신과 천관의 이야기가 서린 천관사 터 천관사는 신라 김유신과 관련 있는 절이기도 하다. 천관사 터는 김유신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재매정과는 불과 500m 거리로 문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젊은 시절 김유신은 기녀 천관과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둘의 신분이 달랐다. 김유신은 옛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증손자로, 가야가 법흥왕에 항복하며 신라 진골 신분으로 편입된 왕족 가문이었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은 관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이끌며 신라에 충성한 장군이었고, 어머니 만명부인은 신라왕족의 딸이었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왕족 가문이니 김유신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하지만 유신은 기녀 천관과 가까이 지냈다. 이를 알게 된 만명부인이 늦은 밤 귀가하는 유신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너는 왕족의 핏줄이다. 장차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 공명을 세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랐는데, 술과 미천한 기생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귀함을 버리니 웬일이냐”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자 유신은 크게 뉘우치며 무릎을 꿇고 다시는 기방 출입을 하지 않겠노라, 다시는 천관을 만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관은 오지 않는 유신을 날마다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근신하던 유신은 아주 오랜만에 벗과 술을 나누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유신은 집으로 가기 위해 말에 올랐다. 술기운 때문인지 말 위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유신을 태운 말은 매일 향하던 곳으로 갔다. 천관이 있는 기방이었다. 천관이 반갑게 달려 나와 유신을 부축했다. 인기척에 정신을 차린 유신은 자신이 천관의 집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유신은 천관을 거칠게 밀쳐내고는 가차 없이 말의 목을 벴다. 천관은 냉기서린 유신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하고 마당에 쓰러졌다. “다시는 기다리지 마시오” 유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어머니와의 약속이다. 내 어찌 대장부로 태어나 약속을 어기겠는가. 단 한 번의 결심이라도 헛되이 하는 것은 대장부로써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유신은 다시는 천관을 찾지 않았다. 유신의 냉정하고 섬뜩한 모습을 본 천관은 날마다 눈물로 보내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변심한 유신을 원망하며 향가 《원사(怨詞)》를 지었다고 알려졌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훗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이 천관을 다시 찾았을 때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유신은 그녀가 살던 곳에 ‘천관사’라는 절을 짓고 넋을 위로했다. 복원된 팔각삼층석탑과 사라진 석등 도당산 기슭 풀밭에 세워진 탑은, 소녀처럼 새하얗게 빛난다. 어찌 여기에 있소, 물으면 머뭇머뭇한 모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누가 여기에 세웠소, 물으면 여전히 머뭇머뭇한 모습으로 얼굴을 돌리는 듯하다. 그래,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한 사내가 사랑하던 여인을 잊지 못해 세웠다는 말. 첫 정을 잊지 못해 평생 여인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는 그 사내는 어디로 갔을까. 사내를 기다리며 수 억만 밤을 지새우다 사라져갔을 탑을, 누가 다시 우두커니 세워 놓았을까. 천관사는 고려시대까지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폐사된 후 절터는 자연스레 잊혀 갔을 테고, 사람들에 의해 치워지고 버려졌을 것이다. 팔각삼층석탑은 2020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기단부와 팔각 탑신석으로 구성된 석탑이 남아 있었지만 상층 부재가 없어 원형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때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작성한 <고고자료>를 토대로 팔각 옥개석받침에 연화문이 새겨진 석탑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흩어져 있던 몇 안 되는 탑재를 모았지만 탑을 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탑의 대부분을 새로 만들어 복원한 터라 상당히 이질적이다. 신라 석탑들은 대부분 사각 석탑이다. 천관사 터 석탑은 사각의 2중 기단에 팔각 몸돌과 지붕돌을 얹었다. 옥개석 받침엔 작은 연꽃을 조각했는데 팔각의 형태와 함께 무척 여성스럽다. 석굴암 삼층석탑과 함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탑신부 외에도 건물터, 문터, 석등 터, 석조시설과 우물 터가 확인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릉 동쪽에 있다(在五陵東)’는 기록이 있고, 금동불상과 ‘천(天)’ 자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수습되면서 천관사의 위치가 확실해졌다. 천관사 터에는 석등유물이 있었다. 발굴조사 후 원상태로 묻어 두었으나 상대석과 하대석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각 솜씨가 상당히 뛰어난 연화무늬 대석이다. 원성대왕 꿈과 천관사 《삼국유사》 원성대왕(元聖大王) 편엔 천관사에 관련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찬 김주원이 처음에 상재(上梓)가 되고, 훗날 원성왕이 되는 경신은 각간으로서 차석의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경신의 꿈에 자신이 복두를 벗고 하얀 삿갓을 쓰고는 12줄의 가야금을 잡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깬 뒤 사람을 시켜 풀이를 하니 복두를 벗은 것은 실직한 징조이고, 가야금을 잡은 것은 목에 칼 씌우는 형을 받을 징조요,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 했다. 경신은 그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며 출입을 삼갔다. 그때 아찬 여삼이 뵙자 청하고는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 더 높은 사람이 없는 것이요,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고, 12줄 가야금을 잡은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하였다. “위로 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이오?” 경신이 묻자 아찬이 답했다. “청컨대 몰래 북천신에게 제사하면 가능하리이다” 얼마 후 신덕왕이 죽으니, 나라에서는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북천 물이 불어 북천 북쪽에 살던 주원이 건너지 못하게 되었고, 경신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니 상재의 무리들이 모두 따라와 절하며 하례하였다. 그가 곧 신라 30대 원성대왕이다. 논을 메워 복원한 천관사 터 지천에 뿌리내린 토끼풀이 한창 꽃을 피웠다. 토끼풀 꽃으로 화관을 만들고, 꽃반지를 엮어 탑 위에 얹어본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탑은, 님을 그리워 하듯 처연하게 서있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경주시가 오는 7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간 ‘제3회 영·호남 장애인문화체육 친선교류전’을 개최한다. 경주시와 여수시 장애인체육회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경주시장애인체육관, 교원드림센터, 경주엑스포대공원 등 3곳으로 나눠 개최된다. 먼저 행사 첫날인 10일 경주시 장애인체육관에서 열리는 개회식으로 시작으로 이틀간의 열전이 펼쳐진다. 이날 개회식에는 주낙영 시장을 비롯해 경주시와 경주시장애인체육회 관계자들이 참석해 환영사와 축사를 전할 예정이다. 이어 친선경기로 탁구, 배드민턴, 보치아, 슐런, 좌식배구 등 5개 종목에서 두 도시의 선수들의 열띤 경쟁을 펼쳐질 예정이다. 또 당일 저녁에는 교원드림센터에서 출전 선수들을 환영하는 연찬회가 예정돼있다. 둘째 날인 11일에는 경주엑스포대공원에서 문화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친선교류전은 2019년 9월 26일 체결된 MOU에 따른 것으로, 두 도시는 격년으로 행사를 개최하며 장애인체육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 상호 협력해 오고 있다.
최부자댁을 취재하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최부자댁에는 많을 때는 100명의 과객이 묵었다는 이야기를 곧잘 들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최부자댁 사랑채가 별채까지 완전히 복원되었지만 그렇게 보아도 100명의 과객은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마음먹고 사람들을 들이면 사랑채 전체에 100명이 앉을 자리는 있겠지만 과객은 묵어가는 사람, 즉 잠까지 자고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텐데 100명은 아무래도 무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쳐도 하루 100명이면 어지간한 호텔 투숙객보다 많은데 그 시대 그 많은 과객들을 어떻게 다 대접할 수 있었을까? 하루 100명 과객이 묵어갈 수 있었던 최부자댁, 잠은 동네의 모든 집에서 잘 수 있어! 이런 의문을 최염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선생님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우리집에 과객은 내가 어릴 때도 하루에 족히 십 수인은 되었을 것이네. 그러나 할아버지가 젊었던 시절에는 족히 하루 100명은 우리 집을 찾아와 밥을 먹고 가든 잠을 자고 하든 했다고 하셨네” 매일 하루 100여명의 과객을 대접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잠자리부터 문제될 수 있다. 그러나 최부자댁 본채만 최부자댁이 아니라고 설명했듯 마을의 기와집이 전부 최부자댁 가솔들의 집이었으니 과객을 분산시켜서 묵게 할 수 있었다. 가솔이 모자라면 마을의 여념집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최부자댁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최부자댁에서 보내서 왔다고 하면 아무 의심 없이 재워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최부자댁 손님맞이는 어떤 손님이건 가리지 않고 무조건 따로 한 상씩 차려주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물론 어떤 손님이냐에 따라서 반찬의 종류가 달랐을 것은 당연하다. 9첩 반상, 7첩 반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반찬 가짓수에 따른 구분이다. 보통 상객들은 9첩 반상이 기본이고 중객은 7첩 반상쯤이라고 보면 된다. 손님에 대한 구분은 다시 상세히 말하겠지만 상객 중에서도 특별한 손님들은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각별한 음식들이 차려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맞이하는 손님의 비중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자리에서 다른 음식을 내주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똑같은 상을 받았다. 누구는 상객이니까 9첩 반상을 받고 누구는 중객이니까 7첩 반상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상객은 최부자댁 가주들이 함께 방을 쓰면서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과객들에게 일일이 한 상씩 차려줄 경우도 의문이 되었다. 과객이 한꺼번에 몰릴 경우 그 많은 상을 어떻게 다 마련할 것인가? 그러자 최염 선생님께서 빙긋 웃으시고는 짧은 일화 하나를 슬며시 말씀해 주셨다.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 집은 200명의 손님을 한꺼번에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네. 그것은 반상기가 최소한 200벌은 있었다는 뜻이지!” 그러면서 최염 선생님이 어렸을 때 실제로 200명의 손님을 한꺼번에 받은 일화를 들려주셨다. 요약하면 이렇다. 서울의 보성 중학에서 최린 선생이란 일가분이 교장을 지낼 때였다. 그분이 보성학원 학생 100명과 천도교 교도 100여명 등 200여명을 이끌고 경주로 왔다. 그렇게 많은 분들이 한꺼번에 경주로 온 것은 천도교 교조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보성 중학교가 한 때 동학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이 운영하셨기에 그 인연으로 묘소를 참배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경주에 도착해 수소문해보니 그 많은 인원이 묵어갈 만한 호텔이나 여관은 물론 밥을 먹을 만한 장소조차 없었다. 그 시절만 해도 숙박업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을 때이고 관광이란 개념 역시 없을 때였다. 경주 불국사역 부근에 철도호텔이라는 작은 호텔이 있었지만 그것을 쓸 계제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생각 끝에 최린 선생은 최부자댁에 연락을 취해 며칠 신세를 질 수 있겠느냐고 알려 왔다. 물론 문파 선생님은 반갑게 이들을 맞아 주셨다. 최린 선생이 문파 선생님께 스스럼없이 이런 부탁을 한 것은 문파 선생님이 최제우 선생과 정무공 이래 한 집안이고 문파 선생 역시 천도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파 선생님에게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은 집안의 고조부 뻘 되는 분이다. 2대 교주 최시형 선생 역시 경주 사람으로 그 분의 집이 최부자댁과는 5리(2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경주 황오리였다. 천도교라 이름을 바꾼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은 그 최시형 선생의 세 번째 부인의 처남이었다. 문파 선생님은 특히 손병희 선생과는 나이를 떠나 깊은 친교를 나누었고 한때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보성전문을 맡아 달라는 제안까지 받았을 만큼 막역한 분이었다. 200명의 학생과 관계자들이 각기 상 하나씩을 마주하고 최부자댁 사랑채에 앉은 모습은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염 선생님은 이 이야기는 할아버지이신 문파 선생님께 들은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게 더 놀라웠다. 이런 중요한 일을 문파 선생님이 아닌 누구에게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최염 선생님의 회고담! “내가 대구대학 상무이사로 있을 때 영천 출신 국회의원이던 이활 씨가 사무국장이던 정모씨를 보내 나를 좀 보자고 했어요. 이활 씨는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데 다른 국회의원들 10여명과 함께 대구 지역 상공업계를 시찰차 들렀다가 나를 보고 싶어 한 것이라. 그러나 심부름 온 사무국장은 이활 의원이 나를 만나고자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는 것 같더구만...” 그들 일행은 당시 대구 동인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경주 최부잣집 주손이 왔다는 말을 듣자 이활 씨는 최염 선생님을 정중하게 국회의원들에게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런 추억담을 펼쳐냈다. “여러 의원님들 제가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제가 어릴 때 보성전문 학생이었는데 200여명의 학생과 교사, 천도교 교도들이 어울려 경주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꺼번에 200명이 경주 최부자댁에 들어가 먹고 자고 했는데 전부 각각의 상에 맛있는 진수성찬으로 극진한 대접을 해주셨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장관이던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자로 치면 저희집도 당대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이 경주 최부자댁 못지않았는데 반상 200개가 동시에 나온 모습을 보고는 ‘이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진풍경이다’고 감탄하며 한껏 기가 죽어버렸습니다” 이활 씨는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하도 기억에 남아 마침 대구에 온 걸음에 최염 선생님을 만나 각별한 우의를 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최염 선생님의 확인 작업이 또 재미있었다. 돌아와서 할아버지 문파 선생님께 그 일을 여쭈어 보았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그 일을 기억해 내셨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 모두 7첩 반상이 나갔다고 하는 겁니다. 이활 씨 집은 영천이고 그곳에서 부자로 소문난 집인데 마침 보성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이활 씨가 200명 손님들 속에 학생으로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라는 말씀이셨지요!” 이 일화를 굳이 소개하는 것은 최부자댁은 언제든지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준비만 되어있었던 것이 아니고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손님들을 한꺼번에 치러 낼 기동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지금의 어지간한 호텔이나 음식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최염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후 최부자댁에 갈 때마다 그 꿈 같은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곤 했다. 당연히 그때는 최부자댁 사랑채가 전부 그 200여명 인사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제각기 7첩 반상기를 마주하고 앉았을 것이니 아무리 넓은 사랑채라도 본채와 별채 자체로는 모자랐을 것이고 어쩌면 마루까지 사람들이 나앉거나 마당에 넓은 멍석이라도 깔렸을 것이다. 그들이 각각 상 하나에 7첩 반찬을 놓고 밥과 국을 먹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壯觀)이었을 것이다. 7첩 반상이라면 반찬만 7종류, 밥과 국까지 모두 9개의 그릇이 상위에 올라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00개 상위에는 모두 1800개의 그릇이 동원되었다는 말이고 만약에 술병과 술잔까지 있었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상상이 안되는 엄청난 상차림 모습인 것이다. 최부자댁 아니면 어떤 집에서 이런 대단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을까? 그런 한편 그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과객들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라 할 것이다.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최부자댁이 과객맞이에 각별하다는 소문이 나 있지 않았다면 그 많은 인원이 그렇게 쉽게 방문할 엄두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님을 맞는 입장에서도 아무리 부자라고 한들 선뜻 그 많은 손님들을, 그것도 전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맞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손이건 주인이건 이런 일이 거리낌 없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우리의 의식수준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나눔과 상생의 정신이 공유되고 있었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형편 되는 사람에게는 떳떳하게 얻어먹을 수 있고 형편이 되면 언제든지 내놓을 줄 아는 기본적인 미덕이 있었던 시대, 반상기 200개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선대의 훌륭한 정신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비뇨의학과를 찾는 많은 남성 환자는 ‘전립선’ 문제로 내원한다. 전립선은 남성 생식기관 중 하나로, 정액을 구성하는 액체 성분 일부를 만들어 분비한다. 그리고 방광 아래에 위치하며 요도를 감싸고 있어 배뇨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전립선 관련 질환으로는 전립선비대증과 전립선암을 들 수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전립선 관련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은 커진다. 남성 배뇨장애의 주요 원인 ‘전립선비대증’ 전립선비대증을 일으키는 주요 위험인자 중 하나는 노화이다. 노화로 인해 전립선이 점차 커지고 요도를 압박하면 방광 출구 폐색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소변 줄기가 가늘어지는 세뇨, 소변 배출까지 시간이 지연되는 지연뇨, 배뇨 후 방광에 소변이 남는 느낌이 드는 잔뇨 등 각종 배뇨 불편감이 생긴다. 전립선비대가 지속되면 방광 출구 폐색에 대한 보상 작용으로 방광근이 점차 두꺼워지고 방광이 딱딱해진다. 그 결과로 방광 용적이 줄고 빈뇨, 급박뇨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증상이 악화하면 삶의 질이 크게 저하되므로 배뇨 불편감이 있다면 적절한 검사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전립선비대증의 검사 및 약물·수술 치료 방법 전립선비대증 환자가 비뇨의학과에 내원하면 일반적으로 배뇨 증상과 관련한 설문, 소변·혈액 검사, 전립선특이항원(PSA) 검사, 전립선 초음파검사, 요속·잔뇨 검사 등을 받는다. 설문지를 작성하게 해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사용한다.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는 염증성 질환 등 배뇨 증상을 유발하는 다른 질환의 동반을 확인하기 위해, PSA 검사는 전립선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선별검사 목적으로 시행한다. 전립선 초음파검사는 전립선의 크기를 측정하고, 요속·잔뇨 검사는 소변 줄기의 상태, 소변량과 잔뇨량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다. 이러한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약물 치료가 먼저 이뤄진다. 알파 차단제는 전립선 요도의 압력과 긴장을 낮춰 배뇨 증상을 개선하며, 빠른 효과를 보이면서도 심각한 부작용이 적어 가장 먼저 사용을 고려한다. 하지만 일부 환자에게는 기립성저혈압이나 역행성 사정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안드로겐 억제제는 디하이드로테스 토스테론(DHT)이라는 남성호르몬을 억제해 전립선의 크기를 줄인다. 일반적으로 전립선 크기가 30~40cc 이상인 경우 사용을 권고한다. 이 약제는 남성호르몬을 억제하기 때문에 성욕 감퇴나 발기부전 등 성기능 저하를 유발한다. 마지막으로 빈뇨, 야간뇨, 급박뇨 증상을 동반한 경우에는 과민성 방광에 대해 주로 사용하는 항콜린제를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전립선비대증 환자는 전통적으로 경요도 전립선절제술, 레이저수술 등 수술적 치료를 받아왔다. 경요도 전립선절제술은 요도에 내시경을 삽입해 커진 전립선을 내부에서 절제하는 수술로, 수십 년간 전립선비대증 치료의 표준이었다. 이 방법은 수술 후 배뇨 증상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만, 역행성 사정 등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 레이저수술은 최근 들어 대부분 홀뮴 레이저를 이용한 전립선적출술(HoLEP)을 시행한다. 경요도 절제술에 비해 전립선의 크기가 큰 환자의 조직 절제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출혈 등 합병증도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립선비대증의 최신 치료법 최근에는 전립선 결찰술(유로리프트), 전립선 수증기 치료(리줌), 아쿠아블레이션 등 새로운 치료법이 도입되고 있다. 전립선 결찰술은 비대해진 전립선 조직의 좌우를 묶어 전립선 요도를 확보하는 수술로, 전신마취 없이 당일 시술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치료는 전립선이 많이 크지 않은 환자들에게 효과적이지만 통상적인 수술 방법보다는 효과가 떨어진다. 전립선 수증기 치료는 고온의 수증기를 가해 전립선 조직을 사멸해 크기를 줄이는 방법이다. 이 치료법도 전신마취가 필요 없으나, 수술 후 도뇨관을 유치해야 하고, 80cc 이상의 전립선에는 효과가 명확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아쿠아블레이션은 높은 에너지를 가진 고속 물줄기를 이용해 전립선 조직을 절제하는 방법이다. 이는 로봇 보조 기술을 활용해 물줄기를 제어하고, 절제 영역을 정확히 조절해 효과적으로 전립선을 절제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이러한 최신 수술법들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용이 높다는 단점이 있다. 전 세계 남성 암 발생률 1위, ‘전립선암’ 전립선암은 전립선에 발생하는 악성종양으로, 전 세계적으로 남성에게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암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발병률이 점차 증가해 2021년도 암 통계에서는 남성에게 네 번째로 많이 발생한 암으로 보고됐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전립선암은 2034년에 이르러 발생률 국내 2위의 암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립선암의 경과는 대체로 양호하지만, 진단이 늦어지면 다른 암과 마찬가지로 치료 성적이 떨어질 수 있다. 전립선암의 증상과 검사 방법 국소 전립선암은 무증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립선암 환자에게 나타나는 배뇨 불편감은 전립선암으로 인한 증상이라기보다는 전립선 비대, 방광 기능 저하로 인한 배뇨 증상인 경우가 많다. 물론 전립선암이 진행되면 방광 출구가 좁아지면서 소변 줄기가 약해지고 잔뇨, 혈뇨 등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또 전립선암이 뼈로 전이되면 해당 부위에 통증이 발생하거나 척추 압박골절 등으로 인한 신경 증상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전립선암은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아 50세 이상의 남성에게는 조기 진단을 위해 1년마다 PSA를 확인할 것을 권고한다. PSA 수치가 상승하면 경직장초음파를 이용한 전립선 생검을 받아야 하며, 조직검사 전에 자기공명영상(MRI)을 시행하기도 한다. 조직검사 결과에 따라 전립선암으로 확진된 후에는 병기 설정을 위해서 전립선 MRI, 컴퓨터단층촬영(CT), 전신 뼈스캔을 시행한다. 이후 PSA, 전립선 조직검사 결과와 병기에 따라서 위험도를 평가하고, 위험도에 따라서 치료 방법을 결정한다. 전립선암의 다양한 치료법 전립선암은 능동 감시, 근치적 전립선절제술, 방사선치료, 남성호르몬 차단요법, 항암 치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한다. 능동 감시는 당장 수술이나 방사선치료와 같은 적극적인 치료를 시행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PSA를 추적 관찰하는 방법이다. 만약 PSA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면 전립선 생검이나 영상검사를 다시 시행해 적극적인 치료를 고려한다. 방사선치료는 전립선과 골반에 방사선을 쏘여 전립선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최근에는 이전보다 정밀한 방사선 조사가 가능해져 배뇨 불편감이나 설사 등 급성 부작용 비율이 줄었다. 최근에 도입된 중입자치료도 일종의 방사선치료로, 무거운 입자를 전립선에 쏘임으로써 암세포를 더욱 효과적으로 사멸할 수 있다. 남성호르몬 차단요법은 주사제나 경구약을 이용해 남성호르몬을 억제함으로써 암을 억제하는 치료 방법이다. 요즘에는 새로운 남성호르몬 차단제들이 호르몬 감수성(반응성) 전이성 전립선암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근치적 전립선절제술은 오랫동안 전립선암의 표준 치료로 제시되어왔다. 하지만 전립선 수술 후에는 요실금이나 발기부전 등 합병증이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 최근에 술기가 발달하고, 특히 로봇수술이 널리 도입되면서 이러한 합병증 발생은 많이 줄었다. 로봇수술은 시야를 10배 확대하고 사람 팔과 유사한 관절을 가진 로봇팔을 이용한다. 로봇수술은 공간이 좁은 골반강 내에 위치한 전립선 적출 시에 요 자제 및 발기와 관련된 구조를 보존하기에 유리하다. 또 로봇수술은 개복수술에 비해 출혈량 등 합병증이 적으며, 회복도 훨씬 빨라 최근에는 대부분 로봇을 이용해 근치적 전립선 절제술을 시행한다. 전립선 질환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PSA 검사와 같은 선별검사와 초음파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아 전립선비대증과 전립선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글: 김종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용인세브란스병원 비뇨의학과 교수 자료제공 : 한국건강관리협회 경상북도지부(대구북부건강검진센터) 자료출처 :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발췌
공고번호 : 경북-경주-2024-00519 경주시 천북면 신당리 1009-3 부근에서 구조 겁이 좀 있어요, 여우같이 예쁜 얼굴에 길쭉한 팔다리가 매력적인 강아지 믹스견 / 여아 / 1차 접종 o / 중성화 x / 3개월 / 1.5kg 입양문의 054)760-2883 ※반려동물이 실시간 입양됐을 수 있으니 확인 전화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