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 영국의 리시수낙(Rish Sunak) 총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D-day 행사 기념식에 불참하고 자국의 총선 지원 후 이른 시간에 영국으로 돌아온 사실을 두고 보수당의 당수이자 영국 수상으로서의 위치를 망각한 처사라며 강력히 비판받고 있다. 6월은 유럽이나 우리나라에 있어서 호국보훈의 의미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슬라이고는 유럽 최초의 한국인 공장 ‘새한미디어’가 1990년대 초부터 공사를 시작, 공장 가동 3년 후 1억 불을 달성하는 등 15년간 번창하다 미디어 환경변화로 2007년 회사는 문을 닫았었다. 이후 약 15년 동안 방치하다 현재는 미국계 주류회사(Sazerac distillery Ltd.)가 인수하여 영업하고 있으며 현재 400여명의 고용 창출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바 있다. 지난 6월 중순 조용한 시골 마을 슬라이고에는 충남 계룡시 소재 아무르 브라스 앙상블과 슬라이고 합창단(Sligo Orpheus Choir)의 합동공연이 울려 퍼졌다. 이 행사는 올해 1월 초 필자가 다니는 교회 ‘Carly Parish Church’ 건축 200주년 행사를 맞아 나의 아일랜드 친구인 레이몬드(Raymond Carty, 78세, Sligo Orpheus Choir의 전 회장)에게 협연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다행히 내가 협연을 제안한 공연팀이 해군군악대가 주축이 된 밴드라는 사실만으로도 예상 밖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아일랜드는 이민의 역사가 깊다. 약 750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 이민(Irish Diaspora)은 19세기 중반 극심한 감자 기근으로 촉발되었으며 주로 미국, 영국, 호주 등에 분포되어 있다. 6.25 발발 당시 많은 아이리쉬들은 해당 국가의 시민권을 획득할 요량으로 미군 또는 영국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였으며, 전사자만 130여명에 이른다. 합동 연주회를 홍보할 목적으로 지역방송인 Ocean FM 방송에 참전용사를 찾는다는 방송을 했다.  이에 10여명이 방송국 또는 합창단 관계자에게 연락해 왔다. 그중 한 사람이 미군 간호장교로 6.25에 참전했던 아넷 대위(Captain Annette O’Connell Herlihy)다. 아넷 대위의 조카 파이델마(Fidelma Flynn)는 늘 자상한 자신의 고모가 늘 삶의 롤모델이 돼 주었다고 회고하며 그녀가 7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2010년 100세의 나이까지 장수하다 영면, 가족 묘지에 모셨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아넷 대위는 1950년부터 3년 간 미육군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과 많은 시민들을 치료했고 제대 후 미국 아틀랜타 주의 적십자사 직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모인 사연 중 가슴 아픈 사실도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 신부들이 6.25 전쟁 초기 남침한 북한군에 의해 공개 처형된 사실(史實)이다. 이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이 섬기던 성당에서 믿음을 지키다 남침한 공산당에 의해 처형되었다. 사망한 신부의 대부분은 1950년 6월 말에서 9월 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남침하는 공산당의 총부리에 맞서 피난도 가지 않고 자신들의 사역지에서 흔들림없이 믿음(faith)을 지키다 순교한 분들이었다. 합동 연주회가 끝나고 중년의 여성 잭클린(Jacqueline Nee creaven) 씨가 필자와 아내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내년 5월 그 신부들의 친지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순교한 성 콜롬반 신부 일곱 분들이 일한 곳과 투옥 또는 사망하여 묻힌 곳을 직접 찾아가는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행사를 위해 필자에게 혹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만약 이들을 도울 방법이 생긴다면 내년 이맘때면 우리에게 친숙한 Dannyboy, Salley Garden 등 아일랜드의 음악을 한국인과 아일랜드인들이 하나가 되어 연주할 유쾌한 상상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이번에 열린 합동공연은 여러 가지 돌발변수에 예산 문제, 양국 간 문화의 차이 등을 고려하면 도저히 진행할 수 없었다. 아무르 밴드 단원들의 나라 사랑 정신과 초청자 측인 Orpheus Choir, Raymond 등의 아낌 없는 지원, 그리고 무엇보다 필자 아내의 보이지 않는 응원,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쪼록 양국의 교회 등 관심을 가지는 단체들과 문화를 통해 서로의 다음 세대가 교류하기 바라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일곱 신부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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