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올린 별단(別單)에 “1)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12왕릉은 20리 안에 있기 때문에 신이 나아가서 살펴보았고, 16왕릉은 20리 밖에 있기 때문에 본주의 부윤으로 하여금 살펴보고 와서 보고하게 하였는데, 왕릉 모두 봉분을 쌓은 것이 완전하고 견고하며 사초(莎草)도 잘 자라서 보기에 무성하다고 하였습니다. 왕릉들은 모두 평야에 있는데, 오직 태종무열왕릉만 거북머리 받침돌 위에 세운 짤막한 비석에 능호만 크게 적혀 있고, 그 밖에는 전혀 하나의 표식도 없어서 어떤 봉분이 어느 왕의 능인지 그저 시골 노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는 것과 고을 아전의 구전에만 의지해야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48왕릉이라고 불렸으나 지금 찾을 수 있는 것은 단지 28왕릉뿐인데, 그나마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석물을 설치해 둔 것으로 말씀드리면, 혼유석과 병풍석 등이 있기도 하지만 형체만 남아 있을 뿐이어서 옛 제도를 상고하기는 어렵습니다. 헌덕왕릉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경순왕전이 있는데, 영정 1본을 지난 무술년(1778)에 영천의 은해사에서 옮겨와 봉안하였으므로 신이 지나는 길에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2)숭덕전과 경순왕전은 모두 참봉이 있는데, 숭덕전 참봉의 경우는 바로 주상의 재가를 받아 내려 주는 자리였습니다. 고(故)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 자리에 도내 사람을 차출하는 것으로 절목을 작성해 두었는데, 근래에 이를 준수하지 않고 다른 도의 사람으로 구차하게 채워 넣은 결과, 다시 가함(假銜)이 되어 오랫동안 재실(齋室)을 비우는 때가 많아서 능과 전의 수호가 소홀해지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 뒤로는 절목에 의거하여 본도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차출하지 말도록 해당 도를 신칙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신라의 여러 왕릉에는 능을 지키는 민호가 3호(戶)씩 있었는데, 근래에는 본부가 군역을 중첩해서 부담시키는 바람에 안착해서 살지 못하고 종종 도피해 버리곤 합니다. 신이 살펴보았을 때, 한 명의 능졸도 없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본부의 부사로 하여금 능졸을 정해서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이 뒤로 여러 능의 능졸은 다른 부역을 부담하는 일이 없도록 이 또한 반드시 엄히 신칙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신라 왕릉의 보존 상태와 관리 실태 그리고 숭덕전·경순왕전의 운영 및 왕릉 수호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당시 신라 왕릉 가운데 12기는 20리 이내에 있어 직접 조사하고, 16기는 20리 밖에 있어 경주부윤에게 조사하도록 하였다. 왕릉의 봉분과 사초는 대체로 양호했으나, 태종무열왕릉을 제외하면 능호를 확인할 표식이 거의 없어 향촌 노인과 지방 관리의 구전에 의존해야 했다. 또한 옛날에는 48기로 알려졌던 왕릉이 당시에는 28기만 확인되어 정확한 능의 위치와 주인을 고증하기 어려웠으며, 석물도 훼손되어 옛 제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숭덕전과 경순왕전의 참봉 임용이 규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제향 시설의 관리가 소홀해졌고, 왕릉 수호를 담당하는 민호와 능졸도 군역과 부역 부담으로 이탈하는 문제가 종종 발생하였다. 이에 본도 인사의 참봉 임용, 능졸의 확보 및 다른 부역의 면제를 건의하여 왕릉과 제향 시설의 체계적인 관리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니 이는 왕릉관리 연구에 가치가 높은 자료다.
조선후기 왕릉 관리에서 능참봉(陵參奉)은 관리·제향·보고를 담당하는 관원이었고, 능졸(陵卒)은 능역을 지키고 현장 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인력이었다. 제도적으로는 관원과 수호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인사 규정의 미준수, 장기 부재, 군역과 부역의 중첩, 인력 이탈 등이 관리의 취약점으로 작용하였다.
실록, 승정원일기, 경국대전,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을 통해서 능참봉과 능졸 제도와 운영 실태를 살펴볼 수 있다.
이만수는 1774년에 진사에 합격, 순조 11년(18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형세를 관망하다가 때를 놓쳐 적도(賊徒)를 격파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경주부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해배)되어 복귀한 이후 공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820년 수원부유수로 부임하여 임지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이만수의 보고 내용은 왕릉 관리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지방 행정의 공식 기록으로 남기려 한 조치라는 점에서 중요하고, 중앙의 감독과 경주부의 현장 행정, 수호 인력의 안정적 확보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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