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땡볕 아래에서 운동회 연습을 하던 기억이 난다. 운동회 날이면 어른들 앞에서 부채춤도 추고, 훌라후프 체조도 하고, 달리기도 했다. 운동회는 아이들뿐 아니라 온 동네가 함께하는 행사였다.
아이들이 귀하다는 요즘, 운동회도 변했다.
뉴스에서는 운동회를 앞둔 학교가 동네 주민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포스터를 내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들이 운동회 좀 하겠다는데 “죄송합니다. 조금만 놀겠습니다”라며 동네에 양해를 구해야 하는 세상이다.
이걸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아줌마는 잘 모르겠다.
한때 ‘초품아’라는 말이 유행했다.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라는 뜻이다. 아이들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안전하게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런 아파트에는 프리미엄까지 붙는다. 초등학교가 가까운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학교가 가까운 것이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는 시대다.
그런데 아이들 소리는 싫다고?
운동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 아이는 혼자 떨어져 있는데 다른 아이들만 운동장에서 놀면 우리 아이의 자존감이 떨어진다며 학부모가 민원을 넣는단다.
안 믿기는가? 믿어라. 며칠 전 뉴스에 나온 이야기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다가 다칠 수 있다는 민원도 이어진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다칠까 걱정이고,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감당해야 할 책임과 민원이 두렵다. 결국 가장 쉬운 방법은 운동장 사용을 막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의 운동장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어디 이뿐이랴?
경주 관내 모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은 2년 내내 소풍이나 현장체험학습을 경험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 밖으로 나가는 행사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교사의 법적 책임 문제, 일부 학부모의 비상식적인 민원, 사고에 대한 부담감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대로 괜찮은가?
민원에 선생님이 파묻히면 그것은 선생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반 전체 아이들의 문제가 된다. 선생님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과 민원이 집중되는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 개인에게 쏟아지는 민원을 학교나 교육기관이 함께 책임지고 처리하는 방식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생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하고, 선생님 중에도 도를 넘어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잘못된 행동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아줌마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교권이나 학부모의 권리가 아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 그 자체다.
다 떠나서 이대로 아이들이 소풍이나 체험학습, 수학여행 없이 학교를 다녀도 괜찮은가?
학교는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만 익히는 곳이어야 하는가?
친구들과 뛰어놀고, 함께 도시락을 먹고,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때로는 다투고 화해하면서 배우는 것은 공부가 아닌가?
그렇다면 학교와 학원은 무엇이 다른가?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둘 줄어들고 있다. 운동회는 소음 민원이 걱정이고, 운동장은 안전사고가 걱정이고, 소풍과 체험학습은 법적 책임이 걱정이다.
걱정되는 것을 모두 없애고 나면 학교에는 무엇이 남을까?
아이들은 교실에 앉아 교과서만 배우고, 선생님은 혹시 모를 민원을 걱정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학교의 모습인가?
아줌마가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 내용보다 운동회 날 친구들과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기억, 소풍 가서 도시락을 나눠 먹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그 시간도 분명 학교에서 배운 것이었다.
아이들이 안전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안전을 이유로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이 과연 아이들을 위한 일일까?
십 년 후, 이십 년 후 누가 선생님이 되려고 할까?
그리고 그때 우리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떤 곳으로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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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아주망 고람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