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6 세계국가유산산업전’ 헤리티지 스테이지에서는 장동선 박사와 이세돌 전 기사가 참여한 참관객 컨퍼런스 ‘유산의 재발견’이 열렸다. 두 연사는 뇌과학과 바둑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를 통해 AI와 인간의 기억·판단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살폈다. 국가유산을 과거의 기록에 한정하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자산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제시됐다.
기억이 있어야 미래를 상상한다
장동선 박사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가 과거를 떠올리는 능력뿐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밝혔다.
강연에서 소개된 연구에 따르면 해마 기능이 손상된 환자들은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경험하지 않은 장소나 미래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능력도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보고 듣고 느낀 기억을 새롭게 조합해 아직 경험하지 않은 장면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역사와 국가유산은 지나간 시대의 흔적이면서 사회가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 축적해 온 기억으로 볼 수 있다.
장 박사는 AI와 디지털 기기에 판단과 학습을 지나치게 맡길 경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약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인간은 문자와 교육을 통해 개인의 기억을 외부에 기록하고 다른 사람의 지식과 연결하며 사고의 범위를 넓혀왔다. 그러나 디지털 기기가 생각을 돕는 도구를 넘어 생각 자체를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집중력과 학습 능력 저하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인지적 근손실’로 표현했다. AI가 내놓은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질문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AI를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는가보다 무엇을 묻고 어떤 답을 선택할 것인지가 인간의 사고력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계산 밖의 선택, 결과를 감당하는 인간
이세돌 전 바둑기사는 2016년 알파고와의 대국을 비롯해 AI 바둑이 변화해 온 과정을 소개하며 인간과 AI의 판단 차이를 다뤘다.
AI는 주어진 조건에서 승리 확률이 높은 수를 계산하는 데 강하다. 반면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면서 판을 넓히거나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만드는 선택은 승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 전 기사는 그 차이를 결과를 대하는 태도에서 찾았다. 바둑에서는 기술뿐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이 둔 수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 박사가 과거의 기억을 미래 상상의 바탕으로 제시했다면, 이 전 기사는 승부 과정에서 쌓인 경험과 선택을 이야기했다. AI는 정확도와 효율을 계산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실패와 망설임을 거치며 판단을 바꿔온 과정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바둑은 대국이 끝난 뒤에도 복기로 이어진다. 자신이 둔 수를 다시 살피며 선택의 이유와 패착의 원인을 되짚는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은 다음 승부의 판단 근거가 되고, 한 사람의 바둑관과 승부 철학을 형성한다.
콘퍼런스에서 다뤄진 기억과 경험의 문제는 국가유산 보존 방식과도 연결됐다. 국가유산을 정밀하게 촬영하고 3D 데이터로 구축하는 기술은 원형을 기록하고 활용 범위를 넓히는 수단이다. 다만 디지털 복제물만으로는 현장에서 유산을 마주할 때 느끼는 규모와 시간의 흔적, 장소가 주는 감각까지 온전히 옮기기 어렵다는 점도 제기됐다.
이에 따라 디지털 기술은 국가유산을 대체하기보다 접근성을 높이고 활용범위를 넓히는 방향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유산의 형태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산이 놓인 장소와 역사, 장인의 기술과 전승 과정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컨퍼런스에 참석한 정지혜 씨(44·포항시 남구)는 “두 강연을 들으며 국가유산을 보존하는 일이 옛것을 지키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우리가 축적해 온 기억이 있어야 새로운 미래도 상상할 수 있다는 설명처럼, AI가 빠르게 답을 내놓더라도 무엇을 질문하고 선택할지는 결국 인간의 몫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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