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힘들다.
한 생명이 오롯이 나에게 의지한다. 한 생명을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이 쉬울 수 있을까? 때로는 아주 버겁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다.
왜 그럴까?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행복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기적이라 부른다.
아줌마는 마흔이 넘어서야 세 아이를 가슴에 품었다. 세 아이는 모두 같은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모두 다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싶다. 다른 만큼 세 아이가 주는 기쁨도 행복도 다 다르다.
쌍둥이는 성별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다. 아기 때부터 아들은 잘 자고 잘 먹었다. 자다가 배가 고프면 예고 없이 고성방가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반면 딸은 잘 잤다. 너무 잘 잤다. 한 번은 너무 자서 자는 아기를 깨워 분유를 먹인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어디까지 자나 보자 싶어 할머니와 두고 봤는데, 최고 열다섯 시간을 잤다.
아플 때도 달랐다. 아들은 자주 앓았다. 하지만 열이 나도 해열제를 먹으면 한 시간이면 금방 내렸고 밥도 잘 먹었다. 한 번은 수족구를 처음 앓았을 때였다. 선생님이 아이가 아파서 밥을 잘 못 먹을 수 있으니 그러면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라도 먹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샀다. 집에 도착하자 아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걱정하며 밥을 줬는데 밥 한 톨 남김없이 다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냉동실에서 오랜 기간 대기해야 했다.
딸은 자주 아프지는 않았지만 한 번 아프면 심했다. 열이라도 나면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으로 닦아줘도 세 시간은 지나야 열이 내렸다. 하지만 약효가 떨어질 때쯤이면 다시 열이 올랐다. 열이 내리고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다시 열이 나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쌍둥이가 같이 움직이면 그 자체만으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 나를 보게 되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 이렇게 무해한 웃음을 지었던 적이 있던가?
낯가림이 좀 있는 막내는 우리 집에서는 제일 똘기 충만한 춤을 추며 부모를 경악하게 한다. 세상 똑똑한 척하면서 은근히 허당의 매력도 갖고 있는 매력둥이다.
그 매력으로 나는 얼마나 자주 웃었던가. 얼마나 자주 행복했던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고된 정신적·육체적 노동을 동반한다. 오죽하면 애 봐주는 것은 잘해야 본전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이 모이면 서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서로 위로한다.
하지만 아줌마는 안다.
아이를 하나 키우든, 둘을 키우든, 셋을 키우든 엄마들은 안다.
그 모든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노동을 감수하고서도 아이가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쌍둥이를 처음 가졌을 때, 낳았을 때, 그리고 세 아이를 키우면서 갖게 된 그 감정을 나는 아직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행복, 즐거움, 축복.
그 어떤 단어도 그 감정을 다 담을 수 없다.
세 아이 중 그 누구 하나 없는 내 삶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엄마가 되지 않고 다시 처녀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거절할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느꼈던 그 이름 모를 감정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을 세상 어디에서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지난 삶 속에서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했던 일이 있었던가?
없다.
아이들은 그 존재만으로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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