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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와 9층목탑의 기억들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45호 입력 2026/09/03 14:06 수정 2026/09/03 14:07
경주의 조선 스토리(219)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황룡사(黃龍寺)는 월성 동쪽에 있고 분황사와 마주한다. 진흥왕 553년 2월에 대궐을 용궁(龍宮) 남쪽에 새로 지을 때 황룡이 나타났기에 황룡사라 이름하였고, 566년 그리고 569년에 담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다. 574년에 장육존상과 좌우 보살상을 조성하고, 584년에 금당을 건립, 674년 7월에 큰바람으로 불전(佛殿)이 훼손되었으며, 754년에 무게가 49만7580근 거대한 황룡사종을 주조하는 등 신라 왕실의 호국 사찰이자 불교문화의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刹柱本記)에 따르면 645년(선덕여왕14)에 9층목탑을 세웠으나, 200여 년이 지나 문성왕 때 탑이 기울어지는 등 문제가 생겨 871년에 중수를 시작해 873년에 목탑을 개수하였다. 953년 화재로 탑이 소실될 위기를 겪었으나, 1012년 수리 당시 고려 현종 때 경주에 있던 궁궐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목재를 가져다가 황룡사탑을 수리했고, 1020년, 1064년에 다시 수리하는 등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쳤으며, 마침내 1238년에 몽골 침입으로 황룡사와 9층목탑이 불타면서 찬란한 역사가 막을 내렸다.

고려 때 최항(崔沆)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지나쳐 황룡사 탑을 수리할 것을 요청하였고, 몸소 감독하며 농사일에 바쁜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집에도 불경과 불상을 모셔두고 승려처럼 살았고, 마침내 집을 희사하여 사원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황룡사와 9층목탑을 직접 감독한 사실을 놓고 보면 그의 업적은 저평가되기에 무리가 있다.

선덕여왕 때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 안홍(安弘)은 불경과 불사리를 신라에 가져왔고,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의상은 진평왕 건복 42년(620)에 태어났는데, 이 해에 동방의 성인인 안홍법사가 서역의 두 삼장과 중국의 승려 2인과 함께 당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기록한다. 안홍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통해서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이 주변국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라 설명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자장법사의 요청으로 탑을 건립했다고 전한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3년에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가 이간(伊干)·용춘(龍春)과 함께 200여 명을 거느리고 2년 동안 작업하여 645년에 완성했고,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하였다고 전하니 자장과 안홍의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황룡사와 9층목탑은 신라 불교문화의 성대함과 왕권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신라 이후 고려전기에 약 26년간 거란(요)전쟁, 후기에 40년간 몽고 장기 항전을 겪으며 옛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깨우친 후손들이 옛 시절을 복원하려고 노력 중이다.
고려 중기 김극기(金克己)는 9층 목탑에 올라 “층층의 계단 빙빙 휘감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하고, 수많은 강과 산이 한눈에 탁 트여 바라보이네. … 굽어보니 동도의 수많은 집이 끝없이 펼쳐지고, 벌집과 개미굴처럼 보이는 집들이 아득히 펼쳐지네.”라고, 높고 장대한 조망을 읊조렸다.

만절당(晩節堂) 박원형(朴元亨,1411~1469)의 「신라회고」에서 “동도의 성곽이 촌락으로 변했고, 옥피리 한가로이 부니 봄 생각이 많네. 옹기종기 오릉에 거친 풀만 우거졌으니, 천년 지나간 일 모두가 아침 꽃이로다.”라고 아침에 피었다가 곧 사라지는 꽃처럼 천 년의 역사와 영화도 순간적으로 덧없음을 언급한다.

포암(圃巖) 윤봉조(尹鳳朝,1680~1761)의 「황룡사」 시에서 “신라 망국의 신하들 뒤에, 황룡사만이 나라의 자취로 남았네. 웅대함은 산속으로 사라지고, 범패소리는 궁궐을 홀리네.”라고, 백마가 등장하는 박혁거세와 황룡사 터만 남았으나 성대했던 불교문화를 언급하면서 쇠잔함과 망국의 한을 드러낸다.

경주출신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午憇黃龍寺」에서 “적막한 신라의 옛 절, 옛 우물 용의 자취가 아득하네. 황룡사의 두 탑은 무너져 풀이 무성하고, 닫힌 절문 사이로 몇몇 승려의 모습만 보이네.”라고 쇠락한 황룡사의 쓸쓸함을 표현하였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경주 옛 동도를 찾아 유람하고 기행문과 한시 등으로 기록을 남겼다. 찬란했던 신라의 황룡사는 사라진 뒤 후인들에게 무엇으로 남았을까? 스스로 자문해본다. 황룡사지는 현재 신라 불교와 왕경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이지만, 조선시대의 경주를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대한 건축물은 이미 사라졌고, 조선의 문인들은 폐허와 남겨진 흔적을 바라보며 신라의 흥망과 자신의 시대를 겹쳐 보았으니 같은 장소에서 시대의 인물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일으켰다. 신라의 세가지 보물은 황룡사의 장륙금상(丈六金像)ㆍ구층탑(九層塔) 그리고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태조에게 바친 성제대(聖帝帶)라 한다. 특히 성대제는 고려에 바쳐진 슬픈 역사이지만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신라를 망한 나라 즉 패국으로 인식하고 고려를 승자의 나라로 드러냈다. 특히 신라의 황룡사와 9층목탑은 고려 현종에 이르러 경주의 조유궁을 헐어 그 목재로 황룡사 9층목탑을 수리했고 신라 왕경의 궁궐 공간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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