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경주역과 80여 km의 폐선로가 멈춰 선 원도심 한가운데 서면, 우리는 비로소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신라 천년의 화려한 이미지 뒤편에서 15만8000㎡에 달하는 구 경주역 부지는 아직도 펜스에 둘러싸인 채 동네와 동네를 가로막고 있고, 기차가 멈춘 성동시장은 폐역 직후 유동인구가 73%나 빠져나가며 심각한 도심 공동화를 겪고 있다. 황리단길에 하루 수만 명이 몰려든다 한들, 불과 몇 블록 떨어진 원도심 골목에는 세탁소와 목욕탕,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30년 넘은 노후 주택과 주차난만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 지금 경주의 민낯이다.
경주의 도시재생은 결코 신라시대에 대한 막연한 향수나 박제된 유적의 복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고대 신라의 계획도시 방리제부터 고려와 조선의 읍성과 물길 다스림, 일제강점기 100년 철길과 관사촌이 남긴 근대의 흔적, 그리고 오늘날 골목을 지켜온 주민들의 생활사까지-도시의 모든 시간 층위(_badtags)를 현재의 마을과 사람의 삶 속으로 맥(脈)을 잇는 힘이 경주 도시재생의 진짜 관건이다.
도시는 단순한 토목이나 건물의 집합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행동과 생활, 눈물과 희망이 차곡차곡 쌓여 새겨진 ‘사람의 무늬[人紋]’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시의 인문을 온전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긴 호흡의 공부’가 절실하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경주를 다 안다”고 착각하며, 공부 없이 주관적인 생각이나 민원성 주장만 던지는 것은 복잡하게 얽힌 경주의 재생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의 경주는 신라왕경 복원과 고도제한이라는 법적·제도적 규제, 1700억 원대에 달하는 폐철도 부지 매입과 주차장 조성이라는 행정·재정적 난제, 그리고 미래 2040 비전과 포스트 APEC이라는 거대한 도시계획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다. 알지 못하면 행정의 결정을 감시할 수 없고,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진짜 대안을 내놓는 참여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경주를 제대로 공부하는 장’을 열어갈 것인가?
첫째, ‘단편적 역사 소비’에서 ‘공간과 시간의 층위를 읽는 구조적 학습’으로 전환해야 한다. 경주 문화재를 관광 상품으로만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철길로 인해 왜 도심이 갈라졌는지, 왜 원도심의 주택 보급률과 노후도가 불일치하는지, 도시의 인프라와 제도가 주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통시적으로 분석하고 토론하는 인문학적 시민 교육이 상설화되어야 한다.
둘째, ‘듣기만 하는 청강’을 넘어 ‘질문하고 토론하는 리빙랩’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번 2026년 도시인문학 기반 경주시 도시재생대학의 시도처럼, 전문가의 강의를 바탕으로 주민들이 짝을 지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지도 위에 직접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로 만들 것인가”를 그리는 숙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한정된 공공 예산을 어디에 먼저 쓸 것인지 모의 투자를 해보며, 거대 담론을 내 삶의 1호 프로젝트로 번역해 내는 훈련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시민이 단순한 ‘수혜자’에서 ‘도시계획의 공동 설계자’로 거듭나는 거버넌스 플랫폼이 구축되어야 한다. 공부하고 숙성된 주민들의 집단지성이 2035 도시재생 전략계획과 구 경주역 개발 방향에 법적·제도적으로 반영되는 통로가 열려야 한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나 광주 푸른 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행정이 일방적으로 공원을 조성해서가 아니라, 긴 시간 공부하고 연대한 시민사회가 도시의 주인이 되어 관리와 운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옛 경주역 100년의 철길은 멈춰선지 오래다. 하지만 그 길 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수천억 원의 콘크리트가 아니라, 경주의 과거와 현재를 치열하게 공부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발걸음이다. 아직 손대지 않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본다. 더 늦기 전에, 파편화된 지식의 껍데기를 깨고 도시의 인문(人紋)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진짜 배움의 장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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