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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오피니언 연재 박성철의 문화단상

마음을 안정시키는 딸깍!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42호 입력 2026/08/06 11:08 수정 2026/08/06 11:09

박성철 교수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확대
박성철 교수
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
1학기 종강이 한 주일 정도 남았을 때 일이다. 수업 진도는 밀렸고, 채점할 과제물은 넘쳐나고, 확인할 출결과 성적 처리도 산더미다. 마음이 급한 상태로 강의를 이어가던 어느 오후, 강의실에 모기처럼 불편한 소리가 강의실을 맴돈다. “딸깍, 딸깍···”

규칙적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낯선 그 소리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잠잠해지나 싶으면 어김없이 들렸다. 기말 범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다루기에 학생들의 집중이 요구되는 대목인데도 진원지를 알 수 없는 그 각다귀 같은 소리는 바쁜 나를 괴롭혔다. 급기야 딸깍 소리를 기다리기까지(!) 하는 자신을 발견할 즈음, 왜 진즉에 “집중하세요!” 하는 소릴 안 했는지 후회를 해가며 힘든 수업을 진행했었다.

새로운 세상에 걸맞게 새로운 백색소음이 개발되었다. 누군가 주머니에서 손가락 한마디만 한 물건을 꺼내 끝없이 눌러댄다. 정체는 ‘키캡 키링’이다. 이름이 어려워서 그렇지, 알고 보면 간단하다. 기계식 키보드의 스위치를 떼어 열쇠고리로 만든 물건이다. 요즘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에서는 이 소리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한다. “출근길 멘털 치유엔 이 소리가 최고!”, “일하다 화날 때마다 무한 연타 중”이라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누구는 말한다. 라부부 인형으로 가방을 꾸미던 유행이 가고 이제는 직접 누르는 소위 ‘촉각의 시대’로 넘어왔다고. 패션지 보그는 이런 문화를 멋있게 ‘카오틱 커스터마이제이션’, 즉 정해진 정답 대신 제멋대로 조립하는 혼돈의 맞춤형 놀이라고 치켜세운다. 스위치마다 누르는 압력과 소리가 다르고 3D 프린터로 뽑은 키캡을 취향대로 갈아 끼울 수 있어 분해와 재조립마저 놀이문화가 되었다.

나라마다 딸깍거리는 이유는 다르다고 분석한다. 한국과 미국의 경우 젊은이들은 치열한 경쟁과 취업난, 만성적인 디지털 피로에 지쳐 ‘손끝 아날로그’에서 위안을 찾는 중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그들은 미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피젯 스피너에서 유행의 근원을 찾는다. 피젯 스피너(Fidget spinner)는 베어링을 중심으로 회전할 수 있는 날이 달린, 손으로 돌리면서 노는 장난감(피젯 토이)의 일종이다. 일본에서는 키보드 소리를 음미(?)하는 ‘타건(打鍵) 문화’의 연장선으로 분석한다. 건반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다 보면 손가락 끝으로 전해오는 현존의 감각을 재미 삼아 즐기는 것이다. 나름 그럴듯하고 쿨한 해석이다.

그럼, 이제 딸깍 심리를 살펴볼 차례. “딸깍 한 번에 화가 스르르 풀려요.”하고 줄줄이 달린 댓글들이 단순히 과장만은 아니다. 이 작은 버튼 안에 제법 그럴듯한 심리학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열쇠는 ‘예측 가능한 보상(reward)’ 같은 것이란다. 우리 뇌는 누르면 반드시 딸깍!, 또 누르면 또 예외 없이 딸깍! 하는 정직한 인과(因果)를 사랑한다고 한다. 당연함이 주는 위안이라고나 할까.

이것을 행동심리학에서는 조작적 조건형성, 쉽게 말해 ‘내 행동이 곧바로 결과로 이어진다’는 경험으로 정의한다. 사실 세상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과가 들쭉날쭉이고 가변적인데, 내 손 안의 키캡만큼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식인 거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구체적인 확실성만큼은 나를 둘러싼 불안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제감’이라고 정의해도 좋겠다. 시험이나 취업, 인간관계, 그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키캡 키링은 100% 내 손안에, 내 통제 안에 있다. 남편(?)이 아니라 유일한 ‘내 편’이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주의의 닻’이란 개념도 적절하다. 사람의 주의력이란 허점이 생기면 언제든지 엉뚱한 걱정으로 새나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손끝의 단순 반복은 주의를 붙잡아두는 닻(anchor) 역할을 한다. 회의 중에 펜을 돌리거나 다리를 떠는 사람이 외려 집중을 더 잘하기도 하는 이유다. 진화심리학으로도 근거가 있다. 침팬지는 불안할 때 서로의 털을 골라주고, 사람의 아기도 뭔가를 빨거나 만지작거리며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리드미컬한 손동작으로 자신을 진정시키는 자기 위안(self-soothing)은 아주 오랜 본능이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이 모든 안정은 어디까지나 ‘1초짜리 응급처치’ 일뿐이다. 딸깍이 시험을 대신 봐주거나 취업을 시켜주지는 않으니까. 무엇보다 내 마음의 평화가 옆 사람에겐 소음이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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