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뉴스 문화·관광

쌓인 시간이 마침내 무늬가 되는 기적, 3인전 ‘결 / Grain’

오선아 기자 suna7024@hanmail.net 1736호 입력 2026/06/18 13:06 수정 2026/06/18 13:13
왕현민의 나뭇결
정은주의 숨결
박유아의 살결
겹겹이 쌓아 올린 삶의 궤적을 만나다

 

왕현민 《Polygon Bench 06》 Beech, Birch plywood, Rivet, 1500x400x450(h)mm, 2016. <사진=플레이스씨>확대
왕현민 《Polygon Bench 06》 Beech, Birch plywood, Rivet, 1500x400x450(h)mm, 2016. <사진=플레이스씨>
조각가 왕현민과 회화 작가 정은주, 박유아가 오는 20일부터 7월 19일까지 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씨에서 3인 기획전 ‘결 / Grain’을 연다. 이번 전시는 입체 오브제와 추상 회화, 구상 회화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는 세 작가가 결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바탕으로 보이지 않던 시간의 흐름을 표면 위로 끌어 올리는 자리다.

 

전시의 출발점인 결은 무언가가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포개진 뒤에야 비로소 겉으로 솟아오르는 흔적을 뜻한다. 세 작가는 아주 작은 단위를 정직하게 쌓아 올리는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본래 눈에 보이지 않던 내면의 구조와 숨, 타인의 서사를 화면 밖으로 불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왕현민의 나뭇결, 정은주의 숨결, 박유아의 살결로 각각 치환돼 하나의 맥락으로 묶인다.

왕현민 작가에게 결은 나뭇결이자 사물을 버티게 하는 골격이다. 왕 작가는 폭 2밀리미터 남짓한 가느다란 나무 조각을 리벳으로 사방에 잇대어 유기적인 구조를 세우는 작업을 해왔다. 형태를 지탱하는 내부의 뼈대를 감추는 대신 표면으로 과감하게 드러내어 구조 자체가 곧 무늬가 되게 만드는 방식이다. 작은 단위들이 모여 하중을 나누고 형태를 유지하는 그의 작품은 사물을 서 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원리를 눈에 보이는 결로 증명한다.

정은주 작가는 색채 추상 회화를 통해 숨과 결의 관계를 탐구한다. 정 작가는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두터운 붓질을 수십 겹 포개고,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감의 농담을 이용해 평면을 깊이 있는 공간으로 확장한다. 그는 이 반복적인 행위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인 숨”이라고 설명한다. 화면에 층층이 남은 색의 농담은 작가가 견뎌낸 시간의 호흡이며, 관람객이 목격하는 표면은 누적된 숨의 결이다.

 

정은주 《Untitled》 Acrylic on canvas 259x193.9cm, 2021. <사진=플레이스씨>확대
정은주 《Untitled》 Acrylic on canvas 259x193.9cm, 2021. <사진=플레이스씨>

박유아 작가에게 결은 한 인간의 살아온 역사가 담긴 살결을 의미한다. 박 작가는 인물의 뼈에서 피로, 다시 피에서 살로 옮겨가는 과정을 거치며 평면 위에 한 사람의 얼굴을 한 점씩 쌓아 올린다. 해외 입양인의 초상을 담은 ‘위버멘쉬’ 연작에서 타인의 얼굴을 존중의 시선으로 한 겹씩 되살려낸 작가는, ‘홈(Home)’ 시리즈에 이르러 그 초상들을 사적인 집 안의 벽면으로 들여놓는다. 이방인을 안으로 초대하는 이러한 몸짓은 타인의 생애가 지닌 결을 마주하고 그 곁에 머무는 연대의 행위다.

 

박유아 《Home-8488ASTRL》 Pigment on Jangji 120x90cm, 2025. <사진=플레이스씨>확대
박유아 《Home-8488ASTRL》 Pigment on Jangji 120x90cm, 2025. <사진=플레이스씨>

이들 세 작가의 작업은 완성된 형태 뒤로 사라지기 마련인 과정 자체를 정직한 결과물로 제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매끈하게 봉합된 표면이 아닌, 쌓아 올린 시간의 정직한 궤적이 고스란히 비치기 때문에 이들의 작품은 빠르게 소비되기를 거부한다. 멀리서 한눈에 파악하기보다 가까이 다가가 시간을 들여 한 겹 한 겹을 따라 읽을 때 비로소 작품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플레이스씨 최유진 대표는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재료를 다루는 세 작가가 ‘쌓고 드러낸다’는 하나의 태도로 만나는 자리”라며 “관람객들이 작품 앞에서 잠시 걸음을 늦추고, 보이지 않던 시간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순간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발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연중무휴로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저작권자 © 경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