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는 경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지만 정작 황룡사 목탑 안에 무엇이 어떻게 들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 전시는 그 답을 처음으로 내놓는다.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나라의 안녕을 부처에게 기원하며 세운 신라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탑 가장 깊은 곳,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 아래에 부처의 사리를 모셨다. 몽골 침략으로 1238년 불타 없어진 뒤 지금은 그 돌만 남아 있는데, 1978년 발굴 당시 그 돌을 들어올리자 3000점에 가까운 유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유물들이 정확히 어떤 구조로 어떤 의미로 거기 있었는지를 밝히는 데 이후 50년이 걸렸다.
이번 전시는 그 50년 연구의 결산이다. 117건 322점이 한자리에 모였고, 6년에 걸친 보존처리와 과학 조사를 통해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성과들이 담겼다. 전시는 무료다.
‘탑은 부처를 모신 무덤’-용어부터 쉽게 풀어드립니다
전시 기획자인 신명희 학예연구사는 지난 11일 언론 공개 자리에서 용어 설명부터 시작했다. “탑이 왜 만들어졌는지 아시나요? 가장 쉽게 말하면 부처를 모신 무덤이자 건축물입니다.”
탑 안에 모신 부처의 유골을 ‘사리’라 하고, 그 사리를 담고 꾸미는 그릇과 장식 일체를 ‘사리장엄구’라 부른다. 이번 전시에서 보게 되는 모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금빛 상자, 작은 병, 연꽃 모양 받침대, 팔각형 건물 모양 그릇 등 화려한 유물들이 부처를 모시기 위한 정성의 집합체라는 걸 알고 보면 전시가 달리 보인다.
전시장 초입에 용어 설명판을 별도로 마련한 것도 그 이유다. 모바일 리플렛, 키오스크, 복원 영상까지 갖춰놓아 어렵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1300년 전 신라 장인이 몰래 새긴 이름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은 사리함에서 새로 발견된 이름들이다.
872년 경문왕은 황룡사 9층 목탑을 고쳐 세우면서 금동 사리함 표면에 900여 자의 기록을 새겨 함께 넣었다. 목탑을 처음 세운 이야기, 다시 세우게 된 이유,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까지 이것이 ‘황룡사 찰주본기’다. 이미 알려진 이름만 해도 61명, 관료 20명에 승려 41명이었다. 이번 X선 CT 촬영 및 정밀 스캔 조사를 통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글자 24자를 추가로 찾아내어 총 12명의 이름을 새롭게 확인했으며, 그중 뚜껑 안쪽 면과 바닥 판으로 추정되는 조각에서는 사리함 제작에 참여한 작업자(장인)로 추정되는 김충(金忠), 연장(連長), 청선(淸宣), 연창(連昌) 등 4명의 이름이 발견됐다.
신명희 연구사는 “찰주본기는 글씨를 새긴 사람마다 각 면에 자기 이름을 남겼습니다. 뚜껑이나 바닥판의 꽃무늬를 조각한 장인들도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라고 했다. 1300년 전, 왕과 고위 관료와 고승들의 이름 사이 어딘가에, 이름 모를 장인들이 자기 손길이 닿은 자리에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그 이름이 천년을 건너 지금 경주박물관 전시실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돌 구멍 하나가 사리함이었다-50년 만에 밝혀진 구조
이번 전시의 가장 핵심적인 연구 성과는 황룡사 목탑 심초석의 사리공 구조를 처음으로 완전히 밝혀낸 것이다. 1964년 도굴, 1978년 발굴조사를 거쳐 수습된 유물들은 대부분 파손된 채였다. 어떤 판이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뚜껑과 바닥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박물관은 2019년부터 유물을 장기 위탁받아 전면적인 보존처리와 과학 조사를 시작했고, 6년 만에 답이 나왔다.
심초석에 파낸 돌 구멍, 사리공의 벽면, 바닥, 돌뚜껑 안쪽까지 모두 금동 판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도 사리를 향한 안쪽 면만 금도금을 하고, 돌에 닿는 바깥 면은 도금하지 않았다. 돌로 파낸 공간 자체를 황금빛 성스러운 공간으로 꾸민 것이다. 사리함 안에 사리가 담긴 게 아니라 사리공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리함이었다.
보존처리를 담당한 최기은 연구사는 “바닥판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장기간의 조사를 거쳐 이 모든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3D 복원 영상과 실물 크기 재현품이 함께 전시돼 있고, 재현품에 당시 사리기들을 실제로 넣어보는 실험 영상도 볼 수 있다. 1300년 전 설계의 정밀함이 그대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기록 속에만 있던 것들이 실물로 나타났다
문헌 기록과 실물이 처음으로 맞아떨어지는 순간들도 이번 전시의 볼거리다.
‘황룡사 찰주본기’에는 유리 사리병 옆에 금과 은으로 만든 받침대 ‘금은고좌金銀高座’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어떤 유물이 그것인지 오랫동안 논란이었는데 이번에 연꽃 모양 받침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위아래 꽃잎은 금, 가운데 기둥은 은으로 확인됐다. 기록 속 금은고좌의 실체가 드러난 셈이다.
또 찰주본기에는 경문왕이 중수하면서 사리 100매와 함께 ‘법사리 2종’을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법사리란 부처의 유골이 아닌 부처의 가르침인 경전 구절을 사리처럼 모신 것이다. 팔각형 건물 모양 금동 사리기를 조사한 결과, 이중 구조 안에 ‘제법인연생諸法因緣生’(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난다)이 새겨진 은제 판 두 점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기록 속에만 있던 법사리가 1300년 만에 실물로 확인된 것이다.
논란 30년, 드디어 결론 난 사리기 하나
황룡사 사리공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중화 3년(883년)’이라는 중국 연호가 새겨진 금동 사리기가 있다. 883년이면 경문왕 중수(872년)보다 11년 뒤인 데다 명문 내용이 원래 다른 절의 탑에 있었던 것처럼 읽힌다. 황룡사 유물이 맞냐는 논란이 30년 넘게 이어졌다.
이번에 결론이 났다. 도굴됐다 되찾은 몸체와 발굴 당시 수습된 뚜껑의 성분과 접합 흔적을 확인한 결과 두 개가 한 세트임이 확인됐다. 황룡사 목탑 안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확실하다. 다만 왜 다른 절의 사리기가 여기 들어왔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신 연구사는 “황룡사 사리장엄이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쌓여온 결과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황룡사지 빈터의 그 돌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이야기가 발굴 50년 만에 처음으로 경주에서 펼쳐지고 있다. 왕실의 염원과 장인들의 이름, 기록 속에만 있던 유물들의 실체도 지금 경주박물관 전시실에 있다.
전시는 10월 11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토요일 오후 8시까지)까지며 입장은 무료다. 그밖에 9월 25일 추석 당일 휴무. 교육 프로그램과 큐레이터와의 대화 등 부대 행사 일정은 국립경주박물관 누리집(gyeongju.museu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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