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곳곳에서 묵묵히 기업을 이끌어가는 여성 CEO들을 조명합니다. 경주신문은 2026년 특별기획 ‘경주를 움직이는 힘, 여성기업인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진솔한 경영 철학을 기록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섬세한 리더십과 뚝심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여성 기업인들의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께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경주신문은 지역 여성 기업인들의 제보와 추천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겉보기엔 여유롭고 세련된 40대 CEO의 모습이지만 그녀의 지난 20여 년은 철강, 자동차 제조, 건설 등 남성 중심의 험난한 산업 현장 한가운데를 굳건히 관통해 온 치열한 생존기였다.
열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실무에 뛰어들어 숱한 편견과 시련을 극복하고, 여전히 자신만의 사업영역을 개척하며 현재 진행형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혜인 대표의 묵직한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피아노에 붙은 빨간 딱지, 스무 살에 깨달은 뼈저린 현실
나 대표 특유의 강인한 자립심은 남들보다 일찍 겪어야 했던 뼈아픈 시련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부족함 없이 자라던 중학교 시절, IMF 외환위기가 터지며 집안의 피아노에 붉은 압류 딱지가 붙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대 초반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복잡한 재산 분쟁까지 직접 감당하면서 그녀는 돈과 권력의 냉혹한 현실을 너무나도 일찍 깨달았다. “사람보다 돈이 무섭다는 걸 20대 때 깊이 체감했고, 그때부터 스스로 강해져서 악착같이 내 몫을 일궈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그녀의 사회생활은 남들보다 한참 앞섰다. 고3 수능을 막 끝낸 무렵부터 모기업인 고철 스크랩 회사에 들어가 경리 업무를 맡으며 실무의 기본기를 다졌다. 이후 야간 대학(경영학과)에 진학해 이른바 주경야독을 실천했지만, 이미 현장에서 방대한 수기 장부를 불과 몇 달 만에 전산화하며 시스템을 구축하던 그녀에게 이론 중심의 대학 수업은 현실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20대의 나 대표는 누구보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회사 내 필수 불가결한 핵심 인재로 자리 잡았다.
고철, 자동차, 건설… 거친 현장의 해결사로 종횡무진 활약하다
탁월한 업무 추진력 덕분에 나 대표는 모기업 내 여러 계열사를 속속들이 옮겨 다니며 관리팀장 등 실무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투박한 고철 회사에서 시작해 시뻘건 쇳물을 다루는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 철강 회사를 거쳐 종국에는 건설회사 운영전반의 실무를 총괄했다. 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부서나 현장에 투입되어 서류와 행정 시스템을 바로잡고 회사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해결사 역할이었다.
하지만 20대, 30대 젊은 여성이 감당하기에 거친 남성들의 현장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밤낮없는 업무와 잦은 술자리 접대로 이어지는 낡은 영업 문화 속에서 남모를 심리적 압박감이 컸고, 때로는 단순히 나이가 어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편견 어린 시선과 맞서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굽히지 않고 오히려 더 치열한 업무 처리와 당당한 태도로 능력을 입증해 냈다. “제가 거쳐온 곳마다 체계를 세우고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보람은 컸지만 사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스스로를 온전히 돌볼 틈이 없었다”며 그녀는 치열했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세 아이의 워킹맘, 독립된 물류 기업, (주)주안의 수장으로 우뚝 서다
모기업에서 10년 가까이 헌신했던 그녀는 약 4년 전 오롯이 독립하여 화물운송, 주선, 철스크랩을 주 업무로 다루는 현재의 (주)주안(구 성호로지스)을 설립했다. 직장인이라는 안정적인 울타리를 과감히 벗어나 살벌한 물류 시장의 야생으로 직접 뛰어든 것이다.
새로운 도전은 예상보다 훨씬 험난했다. 기존 업체들이 꽉 잡고 있는 견고한 인맥과 진입 장벽, 화물 노조 등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운수업의 현실 앞에서는 큰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철저한 배차 관리와 꼼꼼한 고객 응대로 화주들의 신뢰를 하나씩 쌓아 올렸다. 아무리 작은 건이라도 직접 배차한 트럭이 차질 없이 현장에 도착해 고객과의 약속을 완벽하게 지켜냈을 때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는 그녀.
그녀의 뚝심이 더욱 놀랍고 빛나는 이유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 묵묵히 병행해 냈다는 점이다. 임신과 출산, 수유의 과정을 거치며 사회적 활동과 네트워킹에 제약이 많아 홀로 속을 끓이기도 했다. 그 고충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녀는 결코 일을 놓지 않았다.
무작정 달리기보다 스스로 굴러가는 완벽한 시스템을 꿈꾸며
20여 년을 쉼 없이 달려온 나 대표는 최근 더 큰 도약을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 너무 일에만 파묻혀 지내다 보니 생겨난 헛헛함과 무료함을 채우기위해 가벼운 취미를 일상에 끼워넣으며 인생의 새로운 여유를 찾고 있다. 나 대표는 “과거에는 내 손으로 모든 것을 다 쥐고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렸지만, 이제는 한 발짝 물러서서 현장을 더 넓게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최종 목표는 회사의 덩치를 키워 엄청난 부를 거머쥐는 것이 아니다. 막대한 자본이나 불필요한 경쟁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발로 뛰지 않아도 유기적이고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단단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진정한 꿈이다. “정확한 배차가 필요할 때, 혹은 믿고 맡길 고철 처리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주안의 나혜인 대표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지만 강하고 확실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그녀다.
마지막으로 창업과 도전을 망설이는 여성 후배들을 향해 그녀는 선배로서 단호한 조언을 남겼다. “마음 먹었다면 주저하지 말고 무조건 빨리 움직이세요. 실패조차 빠를수록 무조건 내게 자산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든 쉬지 말고 자신의 일을 계속 이어나가라고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차가운 철판과 거친 흙먼지 속에서 가장 빛나는 청춘의 열정을 바쳐온 나혜인 대표. 화려한 겉치레나 수식어보다는 묵묵하고 정직한 결과로 승부해 온 그녀의 단단한 인생 내공이 앞으로 (주)주안이 만들어갈 탄탄한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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