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기획특집 2026 경주 여성기업인

차가운 철을 다루는 거친 현장 그곳을 움직이는 건 결국 따뜻한 사람의 情

오선아 기자 suna7024@hanmail.net 1728호 입력 2026/04/23 13:02 수정 2026/04/23 13:19
경주를 움직이는 힘, 여성기업인 릴레이 인터뷰⑦ 주식회사 버켓 진보리 이정애 대표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섬세한 포용력으로 현장을 지휘하는 주식회사 ‘버켓 진보리’의 이정애 대표를 만났다. 오선아 기자확대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섬세한 포용력으로 현장을 지휘하는 주식회사 ‘버켓 진보리’의 이정애 대표를 만났다. 오선아 기자

포크레인이 땅을 팔 때 가장 먼저 흙과 부딪히는 단단한 앞부분, 우리는 그것을 ‘버켓(Bucket)’이라 부른다. 전국 곳곳의 건설 현장은 물론 멀리 뉴질랜드 등 해외로까지 포크레인 버켓을 쉴 새 없이 만들어 수출하는 철공 제조 공장의 수장. 매일같이 시뻘건 불꽃이 튀고 무거운 철판이 오가는 삭막하고 거친 남성들의 세계에서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섬세한 포용력으로 현장을 지휘하는 주식회사 ‘버켓 진보리’의 이정애 대표를 만났다. 어릴 적 화가를 꿈꾸던 소녀는 어느덧 칠흑 같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 쇳물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자신만의 삶을 그려나가는 ‘철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부도난 공장, 빚쟁이들에 맞서 선 ‘한국의 철의 여인’


이정애 대표가 처음부터 철강 제조업에 뜻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과거 한 회사에서 경리 과장으로 평범하게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밀린 임금과 퇴직금은 물론, 회사를 살려보려 투자했던 개인 자금까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모두가 도망치고 싶었을 그때, 그녀는 빈털터리가 된 부도난 회사를 직접 인수해 살려보겠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남편에게는 “영국에 마거릿 대처라는 철의 여인이 있다면, 나도 한국의 철의 여인이 되겠다”며 눈물 어린 선언을 던졌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전 사장이 남기고 간 빚 때문에 덩치 큰 이른바 깍두기 같은 채권자들과 신용정보회사 사람들이 매일같이 공장 앞을 막아섰고, 납품 차량조차 나갈 수 없게 위협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그 빚을 자신이 직접 다 떠안고 갚아나갔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설움도 뼈에 사무쳤다. 철판 한두 장을 사려 해도 여자가 사장이라는 이유로 외상 거래조차 해주지 않았고, 거친 남성들의 세계에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설을 듣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밖에서는 억울함에 매일같이 펑펑 울었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애써 밝은 척을 하며 3년이라는 혹독한 시간을 버텨냈다.


직원의 급여는 철칙, 70대 직원과 함께 굴러가는 따뜻한 공장


이 대표가 경영을 시작하며 가슴에 새긴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사람이었다. 과거 부도난 회사에서 월급을 받지 못해 고통받았던 뼈저린 경험이 있었기에, 그녀는 세금과 4대 보험은 절대 밀리지 말자. 그리고 거래처 대금 결제는 늦어지더라도 우리 직원들 월급만큼은 단 하루도 미루지 말자는 확고한 철칙을 세웠다.

 

그녀의 이런 진심은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공장 초기,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사장을 믿고 월급이 조금 밀리는 한이 있어도 묵묵히 기계를 돌려준 초창기 멤버들은 지금까지도 공장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현재 10명 남짓한 직원들이 30명 몫의 매출을 거뜬히 올리는 것은 오랜 세월 다져진 끈끈한 신뢰 덕분이다.

이곳의 직원들은 대부분 50~60대이며, 심지어 80대를 앞두고 있는 어르신도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건강하게 출근을 한다. 이 70대 후반의 어르신은 “내 나이에도 출근할 곳이 있고, 월급날이 되면 아내가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밥을 살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며 이 대표에게 매번 감사를 전한다고 했다.

공장의 분위기 역시 여느 제조업체와는 사뭇 다르다. 과거에는 거친 말이 오가기도 했지만, 지금 이 대표는 “절대 큰소리 내지 말자, 화내지 말고 대화로 풀자”며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현장을 이끈다.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이른 시간 출근해 일찍 업무를 마치고 각자의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유연한 시스템도 도입했다.
 

현재 10명 남짓한 버켓 진보리 직원들이 30명 몫의 매출을 거뜬히 올리는 것은 오랜 세월 다져진 끈끈한 신뢰 덕분이다. 오선아 기자확대
현재 10명 남짓한 버켓 진보리 직원들이 30명 몫의 매출을 거뜬히 올리는 것은 오랜 세월 다져진 끈끈한 신뢰 덕분이다. 오선아 기자


철보다 단단한 신뢰로 맺어진 기적 같은 인복


“저는 제 스스로 한 게 없어요. 다 주위 사람들이 도와준 인복 덕분이죠.” 이 대표는 모든 공을 주변으로 돌리지만, 그 인복은 결국 그녀 스스로가 증명해 낸 정직함의 결과물이다.

 

한번은 공장 이전을 거듭하며 수억원의 비용이 깨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주요 거래처 대표가, 이 대표가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아예 공장 부지를 직접 사서 내어주는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대구의 한 거래처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이 대표를 위해 흔쾌히 선수금을 내어주며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어떤 협력업체는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에서도 진보리가 자리 잡을 때까지 손해를 감수하며 단가를 올리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이러한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이 대표는 회사가 안정 궤도에 오르자마자 결제 대금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지급하며 그 믿음에 보답하고 있다.

 


과거는 돌아보지 마라, 인생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


새롭게 사업을 꿈꾸는 여성 후배들을 향해 이 대표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응원을 건넨다. “과거의 화려함에 얽매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지레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면 포기하기도 쉬워지니까요. 완벽한 준비도 좋지만, 때로는 두려움을 딛고 첫발을 내딛는 작은 용기가 더 큰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숱한 배신과 좌절 속에서도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먼저 품어주고, 철판보다 차가운 현실 속에서 오히려 사람 냄새나는 따뜻한 공장을 일궈낸 이정애 대표. 포크레인 버켓이 거친 땅을 묵묵히 개척해 나가듯, 그녀의 거침없고 따뜻한 인생 개척기는 앞으로도 힘차게 계속될 것이다.

 

저작권자 © 경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