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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가 반한 달항아리, 최영욱 작가 오아르미술관서 개인전

오선아 기자 suna7024@hanmail.net 1725호 입력 2026/04/02 13:41 수정 2026/04/02 15:47
쉼표: 비우고, 머무르고, 채우는

 

최영욱 작가가 2006년 전업 작가로 전향한 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관에서 마주한 달항아리는 그의 인생을 바꿨다. 오선아 기자확대
최영욱 작가가 2006년 전업 작가로 전향한 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관에서 마주한 달항아리는 그의 인생을 바꿨다. 오선아 기자
오아르미술관의 통창 너머로 신라 왕릉의 능선이 장엄하게 흐른다. 그 곁에 수십 년간 캔버스 위에서 수행의 길을 걸어온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가 나란히 놓였다. 빌 게이츠가 소장한 작가로도 유명한 그가 이번 전시 ‘쉼표’를 통해 30년 작업 궤적을 경주 시민들에게 오롯이 드러냈다.

 

최영욱 작가의 전시는 오는 8월 17일까지 이어진다. 오선아 기자확대
최영욱 작가의 전시는 오는 8월 17일까지 이어진다. 오선아 기자


메트로폴리탄의 초라함에서 발견한 당당한 자화상


2006년 전업 작가로 전향한 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관에서 마주한 달항아리는 그의 인생을 바꿨다. 중국과 일본의 화려한 유물들 사이, 구석진 곳에 놓인 비대칭의 달항아리는 당시 무명 작가였던 자신의 처지와 닮아 보였다. 하지만 그 소박함 속에 깃든 당당함과 세련미를 발견한 순간, 그는 달항아리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았다.

 

“우리나라 도자기는 비대칭이고 우연적인 선이 많아요. 그게 꼭 사람 얼굴 같고, 우리 삶의 모습 같았습니다. 소박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당당한 선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붓을 들었죠.”

그의 작업 방식은 지독할 정도로 노동 집약적이다. 젯소와 돌가루, 미디엄을 섞어 캔버스에 얇게 바르고 말린 뒤 사포로 갈아내기를 100여 회 반복한다. 한 번에 두께를 만들면 갈라지기 때문에 얇은 막을 켜켜이 쌓아야만 도자기 특유의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질감이 살아난다.
 

karma, 165 x 150cm, 2011. <사진=작가 제공>확대
karma, 165 x 150cm, 2011. <사진=작가 제공>

화면을 가득 채운 실핏줄 같은 균열, 카르마(Karma)는 이 지난한 과정 끝에 태어난다. 작가는 수성 색연필과 연필을 깎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하루 종일 연필을 깎으며 나무 냄새를 맡는 시간조차 그에게는 사색의 시간이다. 뾰족하게 깎인 연필로 긋기 시작한 선들은 캔버스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우리네 인연의 법칙을 증명하는 것이다.



‘왕릉이 걸어 나오는 듯’ 경주에서 펼친 추상의 확장


이번 전시에는 높이 2m가 넘는 대형 신작이 공개됐다. 작가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항아리가 캔버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듯한 환영을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그 압도적인 에너지는 경주의 왕릉과 만나 한층 깊어졌다. 특히 이번 전시는 달항아리 이전의 초기작 ‘어느 날 이야기’ 시리즈부터, 최근 항아리 속 풍경을 끄집어내 추상적으로 표현한 신작까지 망라되어 작가의 변화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어느날이야기, 35 x 140cm, 2005. <사진=작가 제공>확대
어느날이야기, 35 x 140cm, 2005. <사진=작가 제공>

블랙 시리즈는 작가가 텍사스 사막 여행 중 조명 하나 없는 암흑 속에서 느꼈던 공포와 평온을 담았다. 어둠에 익숙해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선들은 보이지 않는 삶의 본질을 묻는다.


작가는 큐레이터와 함께 2층 전시실에 쉼터 프로젝트 공간을 마련했다. 서울역 앞에서 바쁘게 점심을 먹고 빌딩 숲으로 들어가는 직장인들의 뒷모습을 보며 시작된 프로젝트다. 작은 집 모양의 공간 안에 놓인 달항아리를 마주하며, 관람객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작품이 그냥 그림으로 남지 않고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길 바랍니다. 왕릉의 곡선을 보며 일상을 내려놓듯, 달항아리 안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날이야기, 33 x 162cm, 2004. <사진=작가 제공>확대
어느날이야기, 33 x 162cm, 2004. <사진=작가 제공>

최영욱 작가의 전시는 오는 8월 17일까지 이어진다. 왕릉과 달항아리, 그리고 작가의 카르마가 빚어낸 경계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비움과 채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며 매주 화요일은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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