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홈 오피니언 연재 장편소설 『서라벌』

권길상 장편소설 『서라벌』[2]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50호 입력 2026/10/15 14:13 수정 2026/10/15 14:16

 


여왕의 서거 <3-1>


여왕은 평소 지병이 도져 걸음조차 힘들었다. 더욱이 비담의 난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했고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가슴에 통증이 심하여 헛기침을 크게 했다. 흰 손수건에 선홍빛 객혈이 묻어났다.

“폐하, 괜찮으신가요? 어의를 부를까요?”

옆에서 시중들던 내관이 깜짝 놀라 여왕을 부축했다.

“아니오. 내 병은 내가 잘 아오. 내 병을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오. 전시에 이런 내 사정을 알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니 절대 함구하시오.”

“네, 폐하. 명심하겠사옵니다.”

“비목랑 대목장을 불러 주시오.”

황룡사의 지붕 너머로 짙은 어둠이 깔리고, 궁정은 고요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여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비목랑을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황룡사 9층 탑에 대한 애정은 그녀의 가슴속에 여전히 뜨겁게 용솟음쳤다. 비목랑은 탑을 설계하고 목공의 총책을 맡았던 대목장이었다.

“비목랑, 단청 작업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여왕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부름을 받고 달려온 비목랑은 활활 타오르다 까무룩 사위어 가는 불꽃 같은 여왕의 옥체를 보니 연민과 함께 안쓰러움이 겹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났지만, 의지는 굳건했다.

비목랑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 단청 공사는 마지막 칠을 위한 바탕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다만 색채의 선택에서 몇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할 듯합니다.”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목랑은 비담의 반란으로 심려하는 여왕의 창백한 낯빛을 대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황룡사9층탑 총책인 김용춘이 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중요한 공정을 비목랑 대목장을 불러 이야기하고 보고도 받았다. 그만큼 그녀는 그를 신뢰했다. 목탑의 기초공사부터 외국에서 들어오는 목재의 반입이며 중요 공정을 비목랑 대목장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용화향도龍華香徒1)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비목랑을 황룡사9층탑 창건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비목랑을 만나 보낸 시간은 꿈만 같았다.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한 외전과 조정 대신들과의 내전, 크고 작은 나랏일들은 그녀를 하루도 조용히 놓아두지 않았다.

그런데 비목랑을 만난 후 여왕은 꺼져가는 9층 탑에 대한 야심이 살아났다. 그의 예술적 열정과 여왕의 종교적 신념은 불붙은 사랑처럼 황룡사9층탑의 창건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그녀에게는 황룡사9층탑은 하나의 자존감의 상징이 되었다. 그 탑은 불교의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구심점이자 삼국통일의 열쇠가 될 것이라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목랑 대목장이 탑을 대하는 태도는 그녀와 조금 달랐다. 그 관점 차이로 여왕과 간간이 마찰음이 일어나곤 했다.

“비목랑을 만나면 언젠가는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어요.”

힘은 없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여왕은 말했다.

“폐하, 뭐든 하문하십시오.”

“비목랑, 황룡사9층탑은 우리 신국에게 무엇이라 생각하오?”

그는 한참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지존이신 폐하의 아름다운 자태가 신라인의 긍지가 되고 사모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9층탑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은 영원을 간직한 채 우리 신라인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신라인이 분열되어 길을 잃고 방황할 때 9층탑은 북극성같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모두 하나가 되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라고 외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절대적 존재가 될 것입니다.”

“비목랑 자신에게는요?”

“네, 폐하, 제 개인에게는 평생 절대미絶對美를 갖춘 건축작품을 추구했던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목랑의 자식이나 마찬가지겠네요?”

여왕의 가녀린 음성에서 전해오는 고요한 목소리에 비목랑은 가슴이 저며 왔다. 그는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네, 폐하. 그런 셈이죠.”

“그럼 이제 멋진 옷을 입혀 출가를 시킵시다.”

여왕은 옅은 미소를 띠며 인자하게 말했다.

“비목랑, 단청은 목탑의 꽃이라 생각합니다. 황룡사9층탑 미의 절정은 단청이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폐하. 그것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황룡사9층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 미는 숨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비목랑, 9층탑에 숨어 있는 절대미絶對美는 어떤 것이오. 시간 날 때, 나에게만 살짝 귀띔해 주면 안 되겠오?”

“네, 폐하는 당연히 아셔야죠.”

신라는 당시 9층 목탑을 지어 본 적이 없었다. 신라 조정은 황룡사9층탑의 전체 가공과 조립을 백제 대목장 아비지에게 의뢰하였다. 그러나, 그 탑의 설계는 아비지 상단의 동량棟梁2)이던 비목랑이 했다. 그는 절대미를 알아보는 극소수의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예술적 선구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면서 지닌 능력이 아니었다. 미에 대한 관심과 꾸준한 훈련의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폐하, 단청 공사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건물에 자연의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입니다. 또 비바람으로부터 목재를 보호하여 9층 탑의 수명을 늘려 줄 것입니다.”

“비목랑, 마지막이 될지 모를 청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이라뇨. 폐하. 아직 강건하시고 이루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사옵니다. 무슨 청인지는 모르겠사오나 분부해 주시옵소서.”

“비목랑, 우리 신국의 청, 적, 황, 흑, 백의 오방색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독특한 색채와 향취가 있죠. 그 화려하면서도 자연과 닮은 산뜻한 오방색을 나도 좋아합니다. 연꽃이며 학과 용의 문양과 다양한 색채와 선의 아름다움은 백성에게 꿈을 꾸게 할 것입니다. 희망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뚝 솟은 탑과 함께 신라인의 긍지와 자존감을 높여줄 것입니다. 내가 특별히 청하는 것은 황룡사9층탑의 서까래의 단청만은 화려하면서도 빛을 발하는 금색으로 해 주시오.”

비목랑은 여왕이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여왕은 죽으면 낭산에 묻힐 것이다. 그녀가 죽고 나면 낭산의 33천三十三天, 이른바 도리천忉利天3)에 들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언제나 빛나고 있는 9층 탑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여왕의 간절한 바람을 비목랑은 잘 알고 있었다.

탑에 대한 여왕의 애정과 관심만큼 비목랑은 여왕에 대한 연모와 존경심도 커져 갔다. 그는 아파서 더 가녀린 그녀의 모습이 날개 꺾인 봉황같이 느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녀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다.

여왕이 단청 이야기를 끝마치고 가냘픈 몸을 의자에 기댈 무렵이었다.

‘파지직~.’

장지문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복면을 쓴 살수들이 들이닥쳤다.

한 명이 검은 그림자처럼 날아들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왕의 가슴을 향하여 비수를 날렸다.

퍽 하고 여왕의 가슴에 비수 꽂히는 소리가 났다.

여왕의 몸이 안락의자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녀의 곤룡포에는 선혈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폐하!”

비목랑과 옆에 있던 시녀들이 소스라쳐 비명을 질렀다. 살수는 짧게 눈빛을 주고받고는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1) 용화향도(龍華香徒)---화랑인 김유신이 이끌었던 낭도 집단으로 낭도의 수가 700~800명으로 추정된다. 미래에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한다는 미륵하생(彌勒下生) 신앙을 표상했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김유신 부대가 전장에서 거의 패한 적이 없었던 것도 그를 따르던 낭도들은 필시 김유신을 미륵으로 믿고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선덕여왕은 황룡사9층탑의 기둥 중에 바깥에서 두 번째 줄을 33天柱로 칭하여 그 기둥 중의 하나를 김유신 기둥으로 명명하여 그를 신성시하였다.
2) 동량(棟梁)---목수 중에 현장을 책임지고 운영할 능력이 있는 우두머리를 목수들이 부를 때쓰는 호칭
3) 도리천(忉利天)---수미산 정상은 네모꼴인데 제석천(帝釋天)이 머물고 있다는 이상세계이다.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에 제석천이 머물면서 33천의 천주(天主)로, 4천왕과 32천을 거느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김유신도 32천(天) 중의 한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저작권자 © 경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