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기
안희연
나는 심전도 그래프의 바늘,
당신의 숨을 대신해서 적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다에 도착해 있군요 언젠가 당신은 흰수염고래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지요 현존하는 짐승 가운데서 가장 큰 짐승, 무리를 이루지 않고 단독 혹은 두세 마리만 산다는, 심장의 질량은 일 톤에 달하며 몸 뒷부분엔 흰색 반점이 많다는 이야기, 왜 하필 지금 그 기억이 당신을 이끌었는지 알 수 없지만 흰수염고래를 바라보는 당신의 숨은 고요한 궤적을 그리는군요 흰수염고래는 집을 향해 헤엄쳐가고 있네요 내가 있는 세계에서는 가랑비에도 발이 퉁퉁 붓곤 하는데 이곳에선 온몸을 흠뻑 담가도 소매끝조차 젖지 않네요 당신은 망설임 없이 흰수염고래 등에 올라타는군요 가라앉았다 솟구쳐오르기를 반복하며 파도를 일으키는군요 멀어져가는군요 자유롭다고 살아 있다고 느끼나요 그런데 왜 눈시울이 붉어질까요 왜 자꾸 창백한 창틀과 바람에 흔들리는 흰 커튼이 떠오를까요 나는 다 기억합니다 우리 함께 지나온 청보리밭 넘실대던 길, 나무둥치에 앉아 숲의 비밀을 듣던 시간, 타닥타닥 타오르던 모닥불소리, 담요의 촉감과, 흰모래사장에 들개처럼 서서 바라보던 석양까지도…… 당신의 감은 눈 속에 이렇게 넓은 세상이 들어 있을 줄 몰랐어요 이 모든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보고 싶었던 걸 보았을까요 찾았을까요
하지만 너무 오래 물속에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이제 그만 나와 함께 뭍으로 가요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오두막을 지어줄게요
뭍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어요 곧 가로등에 불이 켜질 시간이에요
그만 깨어나주세요
자꾸 그렇게 자신을 잊으려 하지 말아요
살아있음의 축복을 알리는 작은 ‘바늘’ 하나
이 바늘은 심지어 “창백한 창틀과 바람에 흔들리는 흰 커튼”의 불길한 순간(죽음)을 떠올리면서, 살아 있어서 아름다운 날들, “함께 지나온 청보리밭 넘실대던 길, 나무둥치에 앉아 숲의 비밀을 듣던 시간, 타닥타닥 타오르던 모닥불소리”를 떠올려보라고,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오두막을 지어줄게요” 간청하기도 한다.
안희연 시의 화자들은 식물 화자도, 사물 화자도 많다. 그들이 한결같이 인간 중심의 시선을 식물, 사물의 것으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놓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인간)의 잠을 지키”고 “슬픔이 작동하는 회로를 아는 사이”(「율마」)가 되어 “깨어나주세요”라거나, “죽지 마 살아 있어줘”(「자귀」)라고 애원한다. 이는 안희연 시의 사물, 식물이 인간과 서로 눈길을 나누며 삶의 중요한 장면들을 호흡하고, 서로의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공유하기를 바라는 의지로 읽힌다. 이 시의 “우리 함께”(2연)와 “나와 함께”(3연)라는 구절을 보라.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병원 응급실에서는 심전도 그래프 바늘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너무 빠른 나이에 감은 눈 속 “이렇게 넓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우주의 기운 속으로 흩어져 가선 안 된다. 살아있으니 이런 시도 읽고 좋은 가을날도 맞이하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리는 한 편의 시를 이 가을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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