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홈 오피니언 연재 손진은 시인의 詩間

무인도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18호 입력 2026/02/05 11:02 수정 2026/02/05 16:11

무인도

 

                                 민병도

 

왜 여태 몰랐을까

나 또한 섬이었음을


그리움 후송해갈

배 한 척도 오지 않고

파도에 마음 베이는

뼈 하얀 저 무인도

 



섬과 길, 그리고 ‘자아’에 대한 명상



손진은 시인확대
손진은 시인
사람들은 누구나 타자와의 관계에서 영속성과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을 시인은 “왜 여태 몰랐을까”라는 탄식으로 표현한다. 생에서 만난 어떤 특정한 계기를 통해 그는 개별인간의 고독한 실존(“나 또한 섬이었음을”)을 깨닫게 된다. 더욱 삶의 격전지에서 안락하게 자신의 ‘그리움’을 머언 후방으로 보내줄 “배 한 척도 오지 않”는다. ‘그리움’은 인간에 대한 바램이 있기에 가능한 감정이다. 그러나 현실이 호락호락 그걸 허용할 리도 없지만, 기실 그 자신이 ‘후송지’에서 그리움을 되새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더 옳다. “파도에 마음 베이는”이란 종장 첫구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초장에서 제기했던 자신의 섬이었음을 알게 된 계기를 발견한다. “파도에 마음 베이는”이라고 은근히 썼지만 ‘나’는 실제로 타자로부터 큰 상처를 입고 있었던 거다. 오죽했으면 무인도 행을 결심했을까? 그렇다고 무인도가 해결책이 될까? 이 시의 절정인 “뼈 하얀”이라는 종장 마지막 구를 보면 무인도도 온통 적막을 한껏 뒤집어쓰고 있는 유배지의 형국이다.

  

결국 이 시는 우리가 일상에서 고립될 때 몸과 영혼은 타자의 말과 행동이라는 파도에 마음 베인 뼈 하얀 무인도가 된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생이 상처의 연속이 되고, 개인이 고독한 실존이 될 때도 시인은 끝내 무인도 행을 선택하지 않는다. 설령 고립된 무인도가 되었을 때라도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 “상처 안에 길이 있”(「마침표」)음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유효한 출구가 바로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전략이다. 시적 용어로는 ‘자아의 대상화’라고 부른다. 다음 시편은 그것이 적용된 사례다.

 

 

 

길

 

                                                  민병도

 

새벽 두 시, 취한 내 영혼을 부축해 와서

초인종을 눌러주고는 돌아가지 못한 길 하나

밤새워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구나.

 


만상이 숨죽이는 시간인 “새벽 두 시,” “취한 내 영혼을 부축”하느라 따라와 “초인종을 눌러주고는 돌아가지 못한 길”이라니! 더욱 “밤새워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금방 이해가 되지 않지만 찬찬히 생각을 거듭해 보면 우리는 거기서 내 영혼이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자아를 떠올릴 수 있다. 세상의 타자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취해 쓰러진 무력하고 나약한 자아, 그 모습이 안쓰러워 부축해 와서 데려다주며, 그것도 안심이 안 돼 지켜보며 밤새워 한기를 견디며 비를 맞는 또 하나의 내적 자아인 길, 두 자아가 감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작품임을 알아차린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을 ‘늙은 길’의 노래’라고 불러도 되겠다. 그동안 살아온 생애의 집적이 모여진 것이 ‘길’이기도 하거니와, 일상에 허덕이며 지친 자아를 위무하며 혼자 비를 맞는 허전한 ‘길’의 어깨와 표정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길은 한 영혼이 술에 취해 쓰러졌을 때, 그를 부축해 와서 집에 데려다 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저런 진땀과 환멸의 아득한 시간들이, 고비들이 떠올라 그를 차마 재워두고 떠날 수는 없었으리라. 어쩌면 술에 취해 쓰러진 영혼도 그것을 부축해온 손길인 ‘길’도 둘이 아니라 하나였겠지만, 자아를 이렇게 대상화시켜 놓은 상태에서야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경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