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민병도
왜 여태 몰랐을까
나 또한 섬이었음을
그리움 후송해갈
배 한 척도 오지 않고
파도에 마음 베이는
뼈 하얀 저 무인도
섬과 길, 그리고 ‘자아’에 대한 명상
결국 이 시는 우리가 일상에서 고립될 때 몸과 영혼은 타자의 말과 행동이라는 파도에 마음 베인 뼈 하얀 무인도가 된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생이 상처의 연속이 되고, 개인이 고독한 실존이 될 때도 시인은 끝내 무인도 행을 선택하지 않는다. 설령 고립된 무인도가 되었을 때라도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 “상처 안에 길이 있”(「마침표」)음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유효한 출구가 바로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전략이다. 시적 용어로는 ‘자아의 대상화’라고 부른다. 다음 시편은 그것이 적용된 사례다.
길
민병도
새벽 두 시, 취한 내 영혼을 부축해 와서
초인종을 눌러주고는 돌아가지 못한 길 하나
밤새워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구나.
만상이 숨죽이는 시간인 “새벽 두 시,” “취한 내 영혼을 부축”하느라 따라와 “초인종을 눌러주고는 돌아가지 못한 길”이라니! 더욱 “밤새워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금방 이해가 되지 않지만 찬찬히 생각을 거듭해 보면 우리는 거기서 내 영혼이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자아를 떠올릴 수 있다. 세상의 타자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취해 쓰러진 무력하고 나약한 자아, 그 모습이 안쓰러워 부축해 와서 데려다주며, 그것도 안심이 안 돼 지켜보며 밤새워 한기를 견디며 비를 맞는 또 하나의 내적 자아인 길, 두 자아가 감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작품임을 알아차린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을 ‘늙은 길’의 노래’라고 불러도 되겠다. 그동안 살아온 생애의 집적이 모여진 것이 ‘길’이기도 하거니와, 일상에 허덕이며 지친 자아를 위무하며 혼자 비를 맞는 허전한 ‘길’의 어깨와 표정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길은 한 영혼이 술에 취해 쓰러졌을 때, 그를 부축해 와서 집에 데려다 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저런 진땀과 환멸의 아득한 시간들이, 고비들이 떠올라 그를 차마 재워두고 떠날 수는 없었으리라. 어쩌면 술에 취해 쓰러진 영혼도 그것을 부축해온 손길인 ‘길’도 둘이 아니라 하나였겠지만, 자아를 이렇게 대상화시켜 놓은 상태에서야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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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의 詩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