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지정(敬止亭)은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 37 높은 곳에 위치한다. 1885년에 광주안씨 안교현(安敎鉉,자 聖和·聖化)이 『시경』「소변(小弁)」의 “어버이가 심어 놓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러러볼 분으로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없으며, 의지할 분으로는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에서 뜻을 취하여 치암(恥庵) 안주(安宙,1500~1569)와 역수(櫟叟) 안윤신(安潤身,1553~1625)을 기려 세운 정자이다.
안주는 양산 출신의 문신으로 증조부 안기(安器)-조부 안몽득(安夢得)-부친 안용지(安勇智)의 가계를 이루고, 1516년 17세에 진사, 1528년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양산 소노마을에 1783년 광주안씨 문중에서 건립한 소계서원(蘇溪書院)에 조선 유학자 안몽득(安夢得)과 그의 아들 안우(安宇)·안주(安宙)·안택(安宅) 3형제 그리고 임란공신 안근(安瑾)·안수(安琇)·안시명(安諟命)·안이명(安以命)·안신명(安信命) 등을 추모하고 있다. 안윤신은 1576년 24세에 진사에 올랐고, 부친은 안응춘(安應春), 생부는 안응권(安應權)이다.
내헌 이재영은 「경지정기」에서 “경주읍성의 북쪽 30리 사제봉(思齊峯) 아래에 범계(凡溪:범골)가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지세가 험하여 안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안씨의 선조 학사 치암공 안주는 인종·명종 년간에 간신을 상소로 탄핵하였다가 기미를 알아 벼슬을 버리고, 강우(江右)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그 뒤로 대대로 이름난 덕망 있는 인물이 나왔으니, 역수공 안윤신은 대북(大北)이 득세하던 과거에서 합격하고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몸을 숨겼으며, 거사공(居士公)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오랑캐를 물리치겠다는 뜻을 굳게 세워 선배들에게 존중받고 후세 사람들의 흠모를 받았다. 안교현 군은 대대로 내려온 집안을 이어받아, 선조인 증조부와 고조부의 묘 아래 삼희대(三希臺) 위에 몇 칸의 건물을 지어 재실로 삼고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았으며, 그 편액을 ‘경지(敬止)’라 하였다. 이에 종제인 안교우(安敎祐)에게 그 내력을 기록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후손인 안교현에 대한 자료가 소략하지만, 면암 최익현, 내헌 이재영,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등과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곧은 성품을 짐작하고, 그 가운데 이재영과 주고받은 서신「答安聖和 敎鉉」에서 어렵사리 정자의 기문을 부탁한 그 과정이 애틋하게 녹아있으니 후손의 도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이렇듯 경지정은 경주에 세거한 광주안씨의 문중 정자로 후손을 교육하면서 선조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정신 공간으로 우뚝하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은 다음과 같이 기문을 남겼다.
경지정기(敬止亭記) - 연재 송병선
동도의 북쪽에 시원한 들과 넓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집들이 즐비하고 인물과 물자가 번성하다. 호계(虎溪)는 골짜기 사이에 자리 잡고, 동쪽과 남쪽의 두 산이 마을을 끼고 들어오며 수목이 골짜기 어귀를 막고 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처음에는 사람 사는 곳이 있는 줄조차 모르다가,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그윽하고 트인 공간의 특별한 구역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 마을 안에서 남쪽 산을 바라보면 산이 입을 벌려 끌어안은 듯하고, 숲과 덩굴이 무성하여 짙고 푸르러, 비록 지척에 있어도 그 안에 정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샘이나 기암 같은 뛰어난 경치는 없으나, 한적하고 깊숙하여 도시 생활에 싫증 난 이가 거닐며 마음을 즐겁게 하고, 느긋이 지내며 정신을 기르기에 충분하다.
이곳의 주인은 누구인가. 안성화[안교현] 군이다. 대대로 살아온 터이고, 선대의 무덤 역시 이곳 위에 있다고 한다. 성화가 일찍이 나[송병선]를 찾아와 “제가 어렸을 때 이 산을 보는데 몹시 민둥산이라 마음이 편치 않아 소나무, 상수리나무 같은 것을 심고 가꾸었습니다. 소와 양이 침범하는 것을 막고, 도끼질하는 자가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재목이 되는 나무들이 저만큼 자랐습니다. 이에 몇 칸의 정자를 지어 자제들이 학문을 강론하고 공부하는 곳으로 삼고, 몇 이랑의 밭을 사서 해마다 선조 제사를 올리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시경』의 ‘桑梓必恭敬止’에서 뜻을 취해 ‘敬止’라 이름하였으니, 부디 한 말씀을 써 주셔서 현판에 걸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훌륭하도다. 자식이 위로는 선조의 자취를 잇고, 아래로는 자손의 기반을 여는 일은, 나무에 비유하자면 조상은 뿌리요, 자손은 가지와 잎이다. … 내 몸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부모가 물려준 것이며, 나의 부모 또한 조상이 물려준 것이다. 이를 위로 미루어 올라가면 조상의 조상에 이르러 끝이 없다. 진실로 자손들이 이 뜻을 알고 이 정자에 오른다면, 충효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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