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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고위봉의 천룡사를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11호 입력 2025/12/18 16:57 수정 2026/03/17 16:0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남산 고위산(高位山) 천룡골에는 신라 때 사찰인 천룡사(天龍寺)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무너진 석탑만이 겨우 복원된 소박한 모습으로 지난날의 위상을 이어오고 있다.

 

노곡리에서 백운암을 거쳐 오르고, 틈수골에서 와룡사를 거쳐 오르는 등 등산로가 다양하다. 옛 천룡사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1709~1773)는 1767년 9월 25일. 용장골 매월당(梅月堂)을 방문하였고, 은적암(隱寂庵)을 지나 고개를 넘어 천룡사에서 묵었다. 그는 『유동도록(遊東都錄)』에서 천룡사에 대한 감상을 남겼는데 “역시 신라 때의 고찰이나, 지금 기거하는 스님은 매우 적고, 당우(堂宇)는 오랫동안 버려져 더 이상 옛날과 같이 성대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범우(梵宇)만 새로 지어져 금벽(金碧)이 빛났다. 기이한 철탑(鐵塔)이 있고, 무거운 금종(金鐘)이 있으며, 석정(石井)은 가운데를 파고 바깥은 모가 났으니, 참으로 모든 것이 기이한 감상 거리였다. 채원(彩遠) 스님은 나이가 82세가 되도록 평소에 베풀기를 좋아하고, 급하고 어려운 일을 돌보았으며,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역시 자기의 옷과 양식을 내어 구제해 주었다고 한다. 그의 본뜻은 복전과 이익을 구하려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고, 세상에 재물을 탐하고 인색하여 창고에 곡식을 쌓아두고 베풀 줄 모르는 사람 또한 부끄러움을 알게 하였다”라고 쇠잔한 천룡사 모습과 철로 제작된 탑이 있었음을 언급하였다.

은적암은 천룡사의 동쪽 암자의 이름으로, 인근 지역의 선비인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은 젊었을 때 천룡사를 자주 오른 인연과 머물러 쉬는 공간의 그리움을 담아 「은적암중창기문」을 지었는데, “절 북쪽 고개 너머 조금 동쪽에 암자가 하나 있는데 이름은 은적암이다. 무너져 폐허가 된 지 30여 년이다. 풍수가의 말에 의하면 이 암자가 천룡사의 저울추[秤錘]이니, 절의 경중은 이 암자에 달렸다고 한다. 이 말은 믿기 어렵지만, 동산(銅山)이 기울자 낙종(洛鍾)이 울었으니, 만물은 진실로 서로 감응함이 있는 것이거늘, 하물며 융결되어 기맥이 흐르고 있음에랴”라고 음과 양이 서로 감응해 폐허가 된 절이 비로소 중창되어야 하는 일을 뒷받침하였다.

『삼국유사』에 “동도 남산의 남쪽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속에서는 고위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되게 고사(高寺) 혹은 천룡사라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 ‘계림의 땅에는 객수(客水) 두 줄기와 역수(逆水) 한 줄기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물줄기의 근원이 천재(天災:자연재해)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天龍)이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에 이른다”하고, 속전(俗傳)에는 “역수는 고을의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 남쪽으로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 이른다”고 하였다. 중국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이 절을 파괴하면 며칠 안에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천룡사는 물과 관련된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창건에 관해서는 옛날 단월(檀越:시주)에게 두 딸 천녀(天女)와 용녀(龍女)가 있었는데, 양친이 두 딸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딸의 이름으로 절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신라 때 중요한 사찰로 조정에서도 관심이 많았지만, 폐허가 되어 고려에 이르러 중수된다. 고려문신 최제안(崔齊顔,?~1046)은 조부 최승로(崔承老), 부친 최숙(崔肅)의 가계를 이루는데, 그는 경진년(1040)에 고위산의 천룡사가 쇠잔하고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자, 조정의 명으로 임금의 장수와 나라의 태평을 발원하기 위해 전당·회랑·방사·주고 등을 모두 이루고, 석조불(石造佛)과 니소불(泥塑佛) 등을 조성하여 사찰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후 재주와 덕이 뛰어난 자를 뽑아 주지로 임명해 절을 관리하게 하였다.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 1793)는 「해인사장경」을 설명하면서 천순2년(1458) 7월 14일에 우부승지 김질(金礩)의 차지로 대장경 50부를 인쇄하였고, 9월 14일에 도승지 조석문(曺錫文)의 차지로 인쇄한 47건 안에서 합천 해인사에 2건, 고령 반룡사에 4건 그리고 경주에는 천룡사에 1건, 불국사에 1건 등을 보관하였다고 언급한다.

이처럼 천룡사는 신라의 유서 깊은 고찰이었으나 폐허가 되었다가 고려에 이르러 중수되었고, 조선조 세조 때는 대장경을 보관하는 중요한 장소로 인식된다. 때로는 조선 선비의 여행지 숙식처 그리고 인근 경주최씨 등 지역 유생들의 공부공간과 기도 도량으로 인기가 많았으니, 필자 역시 천룡사 산길을 따라 옛적 남산에 머문 선비의 자취를 궁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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