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홈 오피니언 연재 지난연재

반공법 4조 1항 위반, 북괴를 고무 찬양하다?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699호 입력 2025/09/04 11:27 수정 2025/09/04 11:30

 

경주최부자댁 관련 박정희 시절의 기사를 펴고 설명하는 10여 년 전 최염 선생. <사진=박근영 작가>확대
경주최부자댁 관련 박정희 시절의 기사를 펴고 설명하는 10여 년 전 최염 선생. <사진=박근영 작가>

 

박근영 작가확대
박근영 작가
KAL기 납북사건이란 1969년 12월 11일 강릉을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승객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에 의해 공중 납치된 사건이었다. 납북 후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치안국이 온갖 수사자료를 동원하며 조직적인 간첩단의 활동으로 규정지었지만 아무도 그 내막을 모른 채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최염 선생이 낯선 이들에게 잡혀갈 무렵에는 납북자 가족들이 납북자들의 빠른 송환을 위해 대한적십자사와 국제적십자사에 애끓는 청원을 하고 있을때였다.


“나는 그들은 만나본 적조차도 없었어요. 그런 내가 북한을 찬양하며 월북을 선동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지장이 찍힌 내막도 뻔한 일이었다. 선생이 기절한 사이에 강제로 찍어버린 것이다. 선생은 어이가 없어 허허 웃었다고 한다. 보통 고문자들을 경멸하면 그들이 다시 선생에게 폭력을 가하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자신들도 허허 웃을 뿐 더 이상 선생을 짓이기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진술조서를 챙겨 들고 나갔을 뿐이다.


그날 이후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로 이관되었다. 나와서야 알았지만 그 고문실은 남대문 경찰서에서 임시로 사용하는 가건물의 어느 한 곳이었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관된 선생은 푸른 수의에 빨간 딱지가 붙은 수의를 입은 채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다. 빨간 딱지는 ‘누구와도 말을 나눌 수 없는 자’라는 뜻이었다.


전재산을 독립운동과 대학설립에 바친 최부자댁 종손이자 실무자에게 빨갱이라니...


반공법 4조 1항 위반, 북괴를 고무찬양한 죄 !! 선생에게 얹힌 죄목이었다. 반공법 위반..., 경주최부자댁의 종손인 선생이 반공법 위반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독방신세를 질 줄 언제 상상이라도 해 봤던가?


“참으로 그 시대가 기막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어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할아버지 밑에서 일평생 나라를 위해 살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어요. 철이 들어서도 역시 할아버지 밑에서 대구대학 사무를 보며 올바른 대학교육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말씀만 들으며 살았지요. 그런데 할아버지의 온갖 정성이 깃든 학교는 독재의 화신에게 빼앗겨 버렸고 나는 나도 모르게 ‘반공법 위반자’가 되어 차가운 독방에 들어앉은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되면서 비로소 선생은 자신에 대한 소식을 밖으로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선생이 형무소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안 가족들은 한 마디로 발칵 뒤집혔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선생으로 인해 온 집안이 초비상이 되어 있었다. 경찰에 실종신고도 되어 있었고 사방팔방으로 선생에 대한 소식을 캐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다고 했으니 가족들의 놀라움이 오죽했으랴.


이런 와중에 첫 재판이 열렸다. 우습게도 1심에서는 지은 죄도 없이 유죄가 되어 징역형에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그런데 선생은 형량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그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자 애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한 일 년의 징역형쯤이라 여겨지는데... 설혹 내가 그 가짜 진술서에 적힌 대로 북한을 고무 찬양했다고 치더라도 그때의 형량은 터무니없이 과한 것이었어요!”


그나마도 천만다행이었다. 집행유예라는 판결이 남과 동시에 선생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어 감옥을 나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감옥을 나온 선생은 곧바로 항소를 준비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죄인이 될 수는 없었다. 하도 모진 고문을 당한 것이라 그냥 그 판결을 받아들인 채 항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하면 수백 년 이어온 가문을 자신으로 인해 엉망으로 만든다는 자책감이 들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다시 맞아 죽을지언정 이렇게 무고한 죄인이 되기는 싫었다는 선생의 피맺힌 회고!!


“나는 이때부터 어떻게든 이 원통한 한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내가 아는 모든 인맥들을 떠올리며 자구책을 마련해 나갔어요. 그러나 반공법 위반이라는 껄끄러운 사안에 대해 변호해 줄 사람이 선뜻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상담해본 대부분 변호사들이 이런 사안은 집행유예로 풀려 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며 항소를 포기하는 게 낫다고 조언했어요. 더 기가 막힐 노릇이라...!”


그때 선생의 변호를 맡아준 분이 신호철 변호사인데 이분은 선생이 심계원에 있을 때 같이 근무하던 변호사였다. 워낙 시험성적이 좋아서 심계원장이 몸소 본인 승낙 받고 심계원에 근무하게 할 만큼 실력이 있었고 선생에게는 동료지만 나이는 몇 살 아래였다.


또 한 사람, 혜성 같이 나타나 도움을 준 분이 있었으니 당시 부장 판사로 활동하던 전상섭 판사였다. 전상섭 판사는 영주 사람으로 나중에 대법관이 된 분이다. 선생이 ‘금성제분’이라는, 부산에서 선생의 매부 부친이 사장인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알게 된 분이다.


전상섭 부장 판사는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며 펄쩍 뛰었다. 당시 전 판사는 부장 판사 중에서도 관록이 오래된 분이고 법조계에서도 신뢰받던 분이라 따르는 판사들이 많았다. 마침 선생 사건을 담당하던 차모 부장 판사 역시 전 판사와 잘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전 판사는 차모 부장 판사를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은 지주 계급을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하는데 최염 씨는 조상 대대로 대지주에 부르조아였어. 그가 경주 최부잣집 종손일세, 그런 사람은 북한에 가면 제일 먼저 처형될 사람이라고. 그러니 북한을 찬양할 턱도 없고 내가 평소 그를 잘 아는데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네”


그러나 전 판사의 조언을 들은 차모 부장 판사는 어리둥절해 하며 반문했다고 한다.


“아니, 그 사람 서류를 보니 집안사람들이 죄다 좌익이고 월북한 사람도 있던데요!”


사실이 그랬다. 선생의 집안은 해방을 전후해 좌익사상에 물든 독립운동자들이 수두룩했다.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김창숙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선생의 외삼촌인데 해방 후 성주군 인민위원장까지 지낸 분이었다. 이분은 뒤에 미군정이 시작되자 스스로 북한으로 올라가 뒤에 평양도서관장까지 지낸 바 있다. 선생의 숙부 역시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선생의 5촌 7촌 친척 중에서도 좌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이 있다. 여기서 말한 좌익이라고 하는 것은 반공 시절 일컬어지던 ‘빨갱이’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전역에 포진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가던 이들 중에는 좌익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은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신분의 평등과 민중의 가치를 이상적으로 제시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을 뿐, 김일성 류의 공산당 독재나 세습체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뒤에 공산주의가 변질되면서 심각한 오류들이 양산된 것과 달리 그들은 이상적 사회주의에 자신의 청춘을 걸었던, 어찌 보면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했던 사회운동가들이었다.

전상석 부장은 그런 좌익 친척과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최염 선생을 두둔하며 어떻게 하건 선생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구명활동을 해 준 것은 그분이 선생을 그만큼 잘 알고 있어서 엉뚱한 짓을 선동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2심은 ‘선고유예’라는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선고유예는 집행유예와 달리 판결을 미루는 것으로 일정 기간 유예를 파기할 만한 사건이 생기지 않으면 선고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선생을 멀리하는 지인들의 외면이 최염 선생을 오래 괴롭혔다.


형무소로 이감된 이후 선생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요즘에는 이런 걸 두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심리적 병명을 밝혀 두고 전문적인 치료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어서 그 힘겨운 공황상태를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이때의 정신적 장애는 생각보다 깊고도 은밀했어요. 어두운 곳을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고 혼자 있으면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몰려들었어요. 공포감보다 더 힘겨운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치닫는 분노와 억울함이었어요. 내가 왜 그 침침한 곳으로 끌려 가서 그토록 심한 폭행과 고문을 받아야 했는지 억울했지요. 만년의 할아버지가 겪으신 분노와 절망을 곁에서 지켜보며 치를 떨었었는데 나는 거기에 더해 고문에 감옥살이까지 했으니...!”

또 하나 견딜 수 없었던 것이 가깝던 사람들이 하나둘 선생 곁을 떠나 선생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좌익분자 아니, 빨갱이….’


선생은 그 무렵 선생의 의지와 상관없이 ‘빨갱이’가 되어 요주의 기피인물 내지 요시찰 인물이 되어 있었다. 선생이 비록 선고유예로 풀려났었어도 선생과 친했던 많은 사람들은 자칫 선생과의 관계로 인해 자신들마저 불온한 대상으로 지목당할지 모른다는 염려로 선생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100회를 끝으로 세계로 갈 경주최부자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지면을 내어 준 경주신문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독자들께 고마움 전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경주최부자 이야기는 페이스북 ‘박근영의 뉴스레터’에서 계속 이어갈 예정입니다.

 

저작권자 © 경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