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이름 뒤에는 늘 경주 출신 화가가 따라붙는다. 경주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좋아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작품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경주와 경주 사람, 그리고 경주 사람의 마음을 그린 박봉수 화백(1916~1991)은 경주 사정동 국당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윈 상실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7세 무렵에 <가면방장수>, 13세에 <연화에 앉은 소녀>, 15세에 <시집가는 날> 같은 그림을 그렸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경주공립학교를 입학하면서 부터였다. 1930년 문화재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 관심이 각별했던 교장 오사카 긴타로의 도움으로 열다섯 나이에 일본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이후 1935년에 2년간 중국 북경미술학원(현 중앙미술학원)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에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3년간 금강산에 들어가서 유점사, 신계사를 비롯한 사찰 승방에서 불교 공부와 수행을 병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1939년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연달아 입선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46년 결혼하였고 이후 50년대와 60년대는 주로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경주예술학교와 근화여중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고청 윤경렬 선생, 이응노 화가 등과 교류했다.
경주에서 주로 사찰 승방을 작업실을 사용하며 여러 스님과 소통하다보니 불교와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유적 답사와 탁본작업, 그리고 신라의 설화를 접하며 신라 문화와 정신이 하나씩 하나씩 작품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칠불암에서 100일 기도 후 얻은 영감으로 분황사 원효대사 진영을 그렸다. 분황사 보광전 약사여래불 뒤에 가면 만나볼 수 있다. <반가사유상〉, 〈비천〉, 〈십이지상〉 같은 그림이 이 시기 대표적 작품들이다. 이 무렵 형성된 화풍이 이후의 작품 전반에 걸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한다.
경주를 사랑한 마음은 그를 부르는 다양한 호(號)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불리어진 ‘국당(菊堂)’은 화가가 태어난 마을 이름에서 가져왔다.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 ‘서봉(瑞鳳)’은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에 매료되어 지은 이름이며, 세 번째인 ‘지홍(智弘)’은 불국사 지효스님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의 소재가 그러하듯 모두 경주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경주에 산재한 신라의 문화유산을 소재로 구상과 추상, 동양화와 서양화를 접목하며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실험과 창의성으로 넘나들었다. 참선, 구도와 깨달음의 세계, 신라의 풍류와 얼을 표현했다. 1956년에 그린 <반가상유상>과 1990년도에 그린 <청태반가사유상>, <청태보살상>, <풍설기천년>, <열반과 나한>, <명상 그리스도> 같은 작품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한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신비스러움과 함께 마음이 고요해진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를 생각게 해준다.
작품 <금장천과의 대화>를 문자추상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다. <고문자도>, <콜라쥬>, <신기의 암소>, <서경> 같은 작품을 보면 그가 왜 수묵추상화의 선구자로 꼽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1930년대부터 수묵추상화를 시도했다. 서구적 추상에서 벗어나 불교적 선(禪)을 밑바탕으로 동양적 미학을 추구했다. 선(禪)을 화폭에 담은 것은 경주라는 태생적 환경과 승방을 드나들었던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홍의 작품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각광을 받았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초대전과 개인전을 하였다. 특히 1963년 작품 <명상 그리스도>는 로마 갈멜수도원에서 카톨릭 상본(像本)으로 제작되어 전역으로 보급하기도 했다.
지홍과 교유하며 그의 그림을 좋아했던 구상 시인은 “오늘의 예술가, 즉 한국 전체의 예술가 중에서 가장 화선불이(畵禪不二)의 삶을 살고 소위 화선일미(畵禪一味)의 경지를 이룬 선과 예술, 도와 예술을 함께 이룬 경지를 보인 이가 지홍 박봉수라고 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환기 화가는 “지홍의 그림에 대한 발상형식은 명상적인 동양의 도 사상을 바탕하고 있다. 작업이 보여주는 미분화 상태의 혼돈 속에서 추상적 묵흔을 조형화하고 다시 의도적 형상을 이루는 분화를 하는 표현법은 독창적이다. 디테일을 외면한 것 같은 무기교의 대담하고 투박한 선이 오히려 생명력이 넘치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라고 평했다.
미술 평론가 이경성은 “화가 박지홍의 작품을 지탱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는 한국적 풍토성이 짙은 장미(壯美)의 세계이다”고 했다.
그가 신라의 나라로 떠난 후 추모하는 전시회가 여러차례 열리곤 했다. 1994년 3주기 추모전, 2011년 20주기 추모 특별전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개최한 바 있다.
이외에도 2019년 〈지홍을 다시 보다〉전이 코리아나 미술관에서, 2020년 금산갤러리에서 지홍 박봉수 회고전 <구도의 흔적>, 2021년 무우수갤러리에서 <지홍 박봉수 회고전>이 열린 바 있다. 이처럼 세월이 지나도 지홍의 그림은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화가는 경주 사정동 국당마을에서 태어나서 효현동에 잠들어 있다. 경주인의 마음으로 경주를 재창조했다. 작품에는 천년고도 서라벌의 웅숭함이 들어 있다. 먼 과거 신라에서 건너와서 신라인의 마음으로 그린 그림 몇 점 남겨 두고 다시 돌아갔는지 모른다. 그림으로 전하는 무언의 말씀을 우리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녹이 쓴 듯 푸른 빛 청태 반가사유상과 명상하는 그리스도가 눈을 뜰 때 쯤이면 알 수 있을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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