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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댁 불타던 날과 사라진 문파 선생의 꿈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697호 입력 2025/08/21 13:56 수정 2025/08/21 14:00

 

사랑채 별채에서 번 최부자댁 사랑채. <사진=박근영 작가>확대
사랑채 별채에서 번 최부자댁 사랑채. <사진=박근영 작가>

 

박근영 작가확대
박근영 작가
“불이야..., 불이야...!!”


집안이 온통 난리가 났다. 집안 권속 모두가 달려 나왔고 동네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어 화마에 휩싸인 최부자댁 사랑채를 둘러싸고 물을 끼얹고 있었다. 그러나 200년이나 된 마른 목조가옥에 붙은 화마가 그깟 물동이쯤으로 꺼질 리 만무했다. 기왓장 튀는 소리와 서까래 무너지는 소리가 탕탕거리고 우지끈거리는 와중에 사랑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1970년 음력 10월 중하순, 양력으로 11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 엄청난 화재의 현장을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지척에서 보고 있었다. 우리집이 바로 최부자댁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로 불과 5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문으로 지친 데다 취기로 인해 전기난로의 불 조절을 소홀히 했다. 불이 붙자 합선되며 불이 집안 전체로 번졌다.


그 불은 공교롭게 문파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일어났다. 선생의 빈소가 사랑채에 마련되어 있었고 비록 정식 장례식은 끝났지만 늦은 조문객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던 무렵이었다.
불은 전기난로의 과열로 일어난 것이었다. 10월이었지만 그 당시는 지금보다 날씨가 훨씬 추웠고 옷들도 지금에 비해 턱없이 부실하던 때였다.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던 문파 선생의 아들 최식 선생이 추위를 이기지 못해 전기난로를 켜두었는데 조문객들이 한두 잔씩 따라 준 술에 취해 난로를 켜 둔 채 잠에 빠졌다.


당시 난로는 조개탄이라는 석탄을 때던 난로가 대부분이었다. 석유곤로도 있었지만 불을 켜기도 어렵고 특히 그을음과 냄새가 심해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전기난로는 그 시절로서는 아무 집에서나 가질 수 없었던 상당히 귀한 것이었고 불을 켜기도 쉽고 생각보다 화력도 좋아 남들의 부러움을 사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전기난로가 자동으로 적정 온도가 되면 꺼지도록 설계되어 있고 안정성 테스트도 하는 것과 달리 그때의 전기난로는 그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자주 사고가 나곤 했다. 난로가 과열되었다 싶으면 적절히 불을 조절해 주어야 했는데 최식 선생은 이어지는 장례에 지친 데다 술까지 취해 불 조절을 소홀히 한 것이다.


난로에서 번진 불은 곧이어 전기선에 옮겨붙으며 합선을 일으켰고 전선을 따라 불이 붙었다. 불은 손 쓸 틈도 없이 빈소뿐만 아니라 전 사랑채에 동시다발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때의 전기는 전체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전기에 불이 붙어 합선되면 그 즉시 당연히 두꺼비집이라 불리던 안전기가 내려가 더 이상 전선을 타고 불이 붙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된 셈인지 불이 계속 붙도록 안전기가 내려가지 않은 것이다.


오래되어 잘 마른 나무기둥과 서까래, 창방과 도리에 애자가 박혀 있었고 그 애자를 따라 온 집안에 전선이 처져 있었다. 불은 삽시간에 큰 사랑채 전부를 집어삼키는가 싶더니 이내 작은 사랑 별채까지 옮겨 붙으며 거세게 타들어 갔고 급기야 집안의 반 이상을 차지하던 사랑채 건물이 전부 불타고 말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 물을 퍼부어댔지만 소용없었다. 문자 그대로 뜨거운 화로에 눈 한 점 던져대는 꼴이었다. 이로써 12대의 역사, 특히 교촌으로 옮겨온 이후인 최기영 공으로부터 180여 년, 살아 있는 역사의 장이었던 사랑채가 처참히 불타고 말았다.


이 불로 인해 사랑채에 있는 대부분 내용물과 조상 전래의 가치 있는 이때 유물들도 몽땅 불에 타버렸다. 진귀한 골동품이랄 수 있는 오래된 병풍과 족자, 휘호들과 사랑채에 그려져 있던 그림들, 문파 선생이 아끼시던 물건들과 손때 묻은 집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오밤중에 일어난 일인데다 워낙 졸지에 당한 참사라 누구 하나 제대로 불 끌 엄두조차 못 내었던 것이 최식 선생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의 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다행하게도 이 불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더더구나 특히, 천우신조로 안채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따로 전기배선이 되어 있었고 바람의 방향이 안채 반대쪽이었기에 무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 이 불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 온갖 신문들이 앞다투어 보도하며 국가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2008년에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불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 목조 유적들에 대한 경비 기준과 방제 기준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최부자댁 사랑채에 난 불로 인해 전통 한옥들에 대한 화재 예방이 이슈가 된 것이다. 여기서 최염 선생의 회고.


“이 불로 인해 아버지는 한동안 심한 자책감에서 헤어나지 못 하셨고 집안의 비난을 한 몸에 안으셔야 했어요. 과한 음주로 인해 할아버지의 빈소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 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내려놓지 못한 평생의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조심이 부족한 면은 없지 않았으나 또 다른 아들인 내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자책감이 지나친 듯해 안타까웠지요.”


한편으로 전기가 일제 강점기에도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은 최부잣집을 아껴서 교촌에 전기를 넣어주지 않은 반면 해방 후에는 이런 구분 없이 무턱대고 전기를 넣어준 바람에 중요한 고택이 불에 탔다는 자조적인 말도 흘러나왔다. 얼핏, 그 말은 얼핏 그럴싸해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 최부자댁에 전화가 들어와 있었는데 비해 전기는 들어오지 못했다. 일본 관리들이 끝까지 전기를 넣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부자댁은 중추원 참의를 지내던 최윤 선생까지 있었으니 전기쯤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끌어왔을 것이다. 전화만 해도 야전식으로 끌어와 넣어주었으니 전기라고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런 일제가 끝내 전기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교촌에 격조 높은 목조 한옥들이 즐비했던 때문인데 혹시라도 화재가 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매장 문화재 보호 차원이었다. 교촌은 신라 때부터 유적이 많던 곳이고 최부자댁만 해도 요석궁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던 곳이다. 땅속에는 유물들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전기를 보내려면 전신주를 심기 위해 땅을 파야 하는데 자칫 땅을 파다가 유물이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기배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염 선생의 기억 한 장면.


“그런 덕분에 일제 강점기에 우리 집에서 일하는 가복들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호야’라고 하는 램프를 매일 씻는 것이었어요. 호야는 기름을 쓰는 램프인데 그을음이 램프의 유리에 시커멓게 앉아서 하루라도 씻지 않으면 불을 켠 둥 만 둥 했기 때문이지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당시 영남대학 정상화도 대두, 최부자댁은 박물관 겸 문파 선생 기념관으로 남아야!


그렇다고 해방 후에 전기가 들어온 것에 대해 굳이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전기배설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해방 후에는 전기가 일반화 되었으므로 교촌에도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일 뿐,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덜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배선이 좀 더 치밀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히 정부 기관의 잘못이었다. 당시 전기는 상공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전기배설에 대한 교육과 안전 점검을 소홀히 한 때문에 전국 도처에서 최부자댁과 비슷한 전기합선으로 인한 화재 사고가 속출했다. 최부자댁 불만 해도 전기합선이 되었는데 안전기가 작동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사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랑채 화재가 단순히 오랜 사랑채에 일어난 불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최부자댁을 오래 취재한 나로서는 그 불이 또 다른 아쉬움으로 와닿는다. 사랑채는 문파 선생보다 훨씬 이전에 지어졌고 누대를 내려왔지만 내 눈에는 사랑채가 곧 문파 선생이요 선생이 곧 사랑채였다. 사랑채가 불탄 것은 문파 선생의 꿈과 뜻이 불탄 것과 다름없이 보였다.


또 하나, 선생의 상을 치르다 불이 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생이 사랑채를 들고 가셨다는 말도 나왔던 모양이다. 선생이 집안의 모든 재산을 대구대학 설립에 희사함으로써 후손들은 더 이상 부자가 아니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육훈(六訓)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고 특히 과객을 맞을 일도 없으니 필요 없는 사랑채를 가져가버린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뜻밖의 화재에 얼마나 애가 탔으면 그런 말까지 나왔을까!


최부자댁 사랑채는 완전히 불에 탄 채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린 시절 정부에서 국정을 홍보하는 전단을 비행기 삐라로 뿌리곤 했는데 교촌은 다른 아닌 최부자댁 사랑채 불탄 대지에 뿌렸다. 그걸 주워 딱지 접으려던 아이들이 최부자댁 사랑채 부지에 바글바글 모였다. 다행히 이 부지는 2005년 11월에 경주시의 교촌 한옥마을 조성계획의 최초 사업으로 정해져 5억원의 예산을 받아 복원이 진행되어 이듬해인 2006년 11월, 불이 난지 만 35년 만에 부활했다. 그리고 다시 2024년에 사랑채 별채가 복원되었다.


한편 2017년 박근혜 전대통령이 파면된 원인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구속되면서 영남대학교 정상화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그와 함께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학 설립자 후손들에 대한 예우도 겸하여 논의된 바 있다.

 
당시 최염 선생은 “후손된 입장에서는 할아버지가 전재산을 희사하신 것은 할아버지의 뜻으로 마무리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재산상이나 물질적인 예우를 후손에게 가하는 것은 할아버지 뜻이나 나의 뜻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는 입장을 피력하며 “다만 조상님들의 정신이 살아 있는 교촌 고택, 우리 집만은 조상님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는 박물관 겸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문파 할아버지의 생가 겸 기념관으로 남기 바란다”는 간절함을 전했다. 그래야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사랑채까지 들고 가셨다는 한스러운 말을 손자인 최염 선생 당대에서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실로 문파 선생의 손자다운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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