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땅 투기’ 사건은 5·16직후 군부세력이 재벌들을 연금하던 시절에 이미 계획된 일이다. 최염 선생에 따르면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던 손정목 씨가 경주중학교 5년 선배였고 대구대학 졸업생으로 최염 선생이랑 아주 친한 사이였기에 그를 통해 부동산 투기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2017년 1월 9일자 한겨레신문에서 보도한 ‘강남땅 투기 원조는 박정희였다’는 기사와 상당히 일치한다. 이 보도에서 박정희의 강남 투기를 폭로한 윤모 씨는 최염 선생의 경주중학교 3년 선배이다. 윤모 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강남땅을 돌아볼 때 수시로 동승하여 도시계획사업을 측근에서 조언하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던 사람이었다. 윤씨는 박정희 경호실장 박종규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아 자신이 사용한 가명으로 대신 땅을 사들인 장본인이었다. 2017년 당시로 환산하면 약 70억 원에 이르는 돈을 받은 윤씨는 황무지와 다름없는 땅을 사들여 백 수십 배에 달하는 차익을 걷어 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중학교 출신 윤모씨와 손정목 서울시 도시건설 과장이 ‘강남투기’에 깊이 간여, 최염 선생에게 자세한 전말 알려
이 사실을 안 손정목 과장은 최염 선생을 추슬러 지금의 양재역 부근의 땅을 사두라고 강력히 권하기도 했다. 당시 양재역 주변은 대부분 호박밭이거나 버려진 황무지 같은 땅이었다. 그런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선을 긋기만 하면 그게 모두 금싸라기 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최염 선생은 그 진의를 몰라 결국 땅을 사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강남땅 투기 이후 윤모 씨가 먼저 서울시 도시개발국장을 지냈고 뒤이어 손정목 과장 역시 도시개발국장을 지냈으므로 강남투기의 수혜자이기도 했던 공무원들이다. 뒤에 손정목 과장이 서울시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2003년에 발간한 ‘서울도시계획이야기(한울/전체5권)’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남땅 투기 사건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어 있고 발간 당시 인기리에 판매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강남개발은 대기업들의 한탕주의와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 경제적 야욕이 맞물려서 일어난 대규모 부동산 투기사업이었다. 강남땅은 조선시대까지 아무도 개간하지 않았던 황무지와 다름없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대문을 중심으로 10리는 조선시대 왕실 전용의 사냥터가 있던 곳으로 민간이 경작을 하거나 집을 지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 10리를 벗어난 접경에 비로소 사람들이 조금씩 살기 시작했으나 그 규모가 겨우 몇 가구씩 흩어져 사는 산촌의 모습일 뿐이었다. 당연히 땅값도 형편없이 쌌을 것은 뻔한 이치다.
이런 땅을 대규모로 개발하고 정부기관과 수도의 기능 상당부분을 강남으로 옮겼다. 심지어는 정부는 강북의 명문 고등학교들을 대거 강남으로 옮기게 하면서 이른바 8학군의 전설까지 만들었다. 이렇듯 강남의 가치상승을 배가시켰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한 한편이 완벽한 땅투기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여기서 최염 선생의 회고!
“두 선배에 따르면 강남이 개발되기 전에 박정희가 가장 먼저 한 일이 1966년 제 3한강교, 지금의 한남대교를 건설하는 것이었어요. 이 다리를 통해 구도심에서 강남으로 옮겨가는 건설자재들이 줄줄이 통과했고 그 사업에 참여하는 건설사의 수뇌들과 개발을 지휘하는 박정희의 측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지나다녔지요. 이를테면 제3한강교는 강남개발의 신호탄이고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재벌건설업체를 키워낸 젓줄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니 박정희 대통령이 투자한 돈이 수천억이 되었을 것이고 이 개발사업에 참여한 건설사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기업들이 박정히 정권에 엎드려 어떤 일이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겠는가. 이렇듯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부터 시작된 강남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고 대기업들의 지원 아래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3선 개헌을 시도, 1971년 대통령 출마하여 다시 당선되었다. 급기야 1972년 유신개헌을 실시하고 자신의 독재체재와 영구집권 야욕을 굳힐 수 있었다. 이 과정에 들어간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은 강남땅 투기와 그에 편승한 대기업들의 지원 덕분이었음은 물어보나 마나 한 일이다.
‘강남 땅투기 사건’이 박정희의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투기사건이었다면 ‘영남대학 땅투기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안정을 실현하기 위한 부정과 비리의 수단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금의 영남대학 경산 캠퍼스 조성에 따른 비자금 조성의혹이다.
영남대 부지 조성 시 경산군수와 경찰서장 동원 헐값에 땅 사들여, 조폐공사에 10% 땅 고가로 되팔기도
이 의혹은 영남대가 기존의 대구대학 건물에서 지금의 경산시로 캠퍼스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105만 평의 막대한 토지를 조성하는 과정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넓은 땅이 학교 부지로 들어가면서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되거나 말살된 농민들의 사유재산권이나 경작권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당시 경산군수와 경찰서장은 모든 일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대학부지 매입에 매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작동하던 시대, 땅을 쉽게 팔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갖은 방법으로 회유하거나 협박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최염 선생은 이때의 증언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당시에 영남대학 총장을 지냈고 2017년에 대구시 교육감을 지낸 우동시 씨가 ‘영남대학 부지가 확정되고 난 이후에 건물이 들어서지 않고 노는 땅이 많았다. 그래서 강제로 땅을 수용당한 농민들이 찾아와서는 ‘학교 내에 방치된 농지에 농사를 짓게 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고 증언했지요.”
이렇듯 영남대학은 농민들에게 빼앗다시피 하면서 강제로 헐값에 사들인 땅이다. 그러나 이렇게 헐값으로 조성한 영남대학 토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살 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차액을 남기고 매각되었다. 학교부지로 사들인 땅 중 약 10%의 토지를, 그것도 엄연한 정부의 금융기관인 한국조폐공사에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돈이 과연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사용처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만약에 이 돈이 어떻게 흘러 나갔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이른 바 교주라고 한 박정희와 영남대학의 관계, 더불어 현재까지 영남대학의 실질적 지배권자로 알려진 박근혜의 관계 역시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다시 최염 선생의 회고!
“당시에 대학 내 모든 건물은 하나의 건설회사가 독점적으로 지었는데 그 회사가 ’경남기업‘이라는 건설회사였고 사장이 신기수란 젊은 사업가였습니다. 이 신기수 사장이 당시 영남대학 재단 이사이기도 했고 뒤에 정수장학회 이사이기도 했어요. 이 신기수 사장이 영남대학 건설과정에서 어떻게 이 사업을 맡게 되었는지도 따져볼 만한 일이지요!”
이렇듯 영남대학교에 대한 문파 선생의 실낱같은 희망 역시 거대한 정치야욕으로 인해 그 빛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남대학이 양적인 팽창이나마 이어나가 대구 경북 지역 대학교육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발전상에 비추어 이는 문파선생이나 최해청 선생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최염 선생은 영남대학의 발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경산으로 캠퍼스를 이전한 이후 학교는 넓어졌고 박정희의 영향력으로 외형적 발전을 이루었어요. 그러나 그것이 박정희의 공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철저히 자신이 권력에서 물러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자구책이었기 때문이지요! 박정희 집권시절 영남대학 총장을 하던 모교수의 경우 청와대 국무위원들보다 더 센 권력을 휘둘렀고 그로 인해 경상북도 도지사나 경상북도 교육감 같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슬슬 기었다는 말들은 끓임없이 나돌았어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인재를 키워야 할 대학이 권력기관으로 전락해 단 한 명 독재자의 미래를 위해 부지를 늘이고 건물을 짓고 학생들을 끌어모아 재정을 충당했어요. 이런 일이 학교발전을 위한 공으로 미화되는 것은 ‘대학’이란 말에 비해 너무나 부끄러운 일 아닌가요? 그러면서 청렴과 결백으로 가장된 것이 합당합니까?”
영남대학이 합병되던 1967년은 문파선생이 82세 되시던 해이다.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의 강제적 합병 이후 선생은 여러모로 많은 변화를 맞았다.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정신도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해 최염 선생의 나이가 34세였다. 문파 선생은 건강이 나빠지는 와중에도 최염 선생에게 또렷하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고 한다.
“염아, 학교라카는 거는 절대로 누구 개인의 것이 대서는 안 된다. 설립자 후손이라고 능력도 없는 기 학교를 맡아가 운영하믄 안 되는 기라. 학교는 누구든지 학교를 학교답게 만들고 교육을 교육답게 하도록 하는 사람이 꾸려가야 되는 기라. 냉자라도 저 학교가 잘 된다면 내가 대학교를 만든 보람이 나는 기라. 내 말을 명심해라. 영남대학은 내 뜻에 반하여 태어났다. 글치만 잘 못 태어난 자식도 기왕 태어났으믄 훌륭하이 자라야 댈 이유가 있는 기다. 그라이 염이 니가 나중에라도 영남대를 도울 힘이 생기거든 아무 소리 말고 가서 힘써 도와라”
그러나 문파 선생은 결국 청구대학과 합병 당시 신혁확 사장이 말한 대로 ‘이가보다 박가가 더 잘할지 모른다’는 독백의 실현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비록 선생의 마지막 꿈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선생은 비교적 편안한 모습으로 당신의 생을 마치셨다고 한다. 1970년 10월 15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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