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1천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 번성하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됐다. 그 흔적은 지금도 경주 곳곳에 남아 있다. 그 흔적은 신라에 살았던 이들을 떠올릴 수 있는 타임머신이다. 경주에 남은 고대 유적을 둘러보며 옛 신라인을 만난다. /편집자 주
신라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은 제48대 경문왕(재위 861~875)의 딸이다. 오빠는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이었다. 정강왕이 재위 1년여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자 진성여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현재 경주에서 진성여왕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통일신라시대 북궁 터로 추정되는 성동동 ‘전랑지’와 인왕동 ‘상서장’에서 그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신라 멸망의 원흉’ 오명…왜곡 가능성도
신라가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제36대 혜공왕(재위 765~780) 때 김지정의 난으로 비롯된 진골 왕족의 분열과 왕위계승전에서부터 쇠퇴의 조짐이 나타났고, 박씨 왕가의 마지막 왕인 제55대 경애왕(재위 924~927)이 견훤에 의해 살해된 포석정의 비극을 신라 멸망의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사건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상당수 학자는 889년(진성여왕 3)의 농민봉기에 주목한다. 하대 이후 누적된 지방사회의 불만이 그해 전국적인 농민반란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기폭제가 돼 마침내 후삼국의 분열과 신라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이 즉위하기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상당수 왕경인이 사치스런 생활에 젖어있을 정도로 왕경은 번창했다. 『삼국사기』에 묘사된 헌강왕 6년(880) 왕경은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기후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여 숯으로 밥을 지으며, 거리에는 밤낮으로 노래와 풍악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진성여왕은 정치를 잘못한 신라 멸망의 원흉으로 비판 받는다. 여기에 ‘음란한 여왕’이란 오명도 덧붙여졌다. 이 같은 진성여왕에 대한 평가는 적절한 걸까.
그는 제48대 경문왕(재위 861~875)의 딸이다. 오빠는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이었다. 정강왕이 재위 1년여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자 진성여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당시 왕위 계승 1순위는 경문왕의 동생인 상대등 위홍이었다. 그런데 정강왕은 유언을 통해 자신의 여동생 만(曼)이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 옛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고사를 따라 그를 임금으로 세우라고 했다. 진성여왕은 정강왕의 유언을 통해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3형제가 나란히 왕위를 이어간 것은 신라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진성여왕 즉위와 관련해 반발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경문왕의 자손들만으로 왕위를 계승하길 바라는 특정 세력의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후기 치열한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해진 것을 경험한 탓인지 제46대 문성왕(재위 839~857) 이후로는 왕위 계승이 안정적으로 이뤄져 왔다. 진성여왕 또한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숙부 위홍의 지지까지 받고 있었다. 따라서 앞선 두 여왕 때보다도 진성여왕대의 왕권은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여왕의 백성을 위한 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정치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즉위 이듬해 2월 숙부이자 남편(혹은 애인)이었던 상대등 위홍의 죽음이 발단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위홍의 죽음 이후 여왕은 용모가 준수한 소년 2~3명을 끌어들여 음란행위를 하고 그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 그러자 아첨꾼이 생기고 뇌물이 만연하는 등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이와 관련해 여왕과 그 측근들의 실정을 비방하는 글이 나붙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전국을 강타한 대기근도 여왕의 발목을 잡았다. ‘1년 조세 감면’이 끝났지만 지방의 각 군주는 세금을 보내지 않았다. 여왕이 관리를 보내 세금을 독촉하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889년(진성여왕 3)의 일이었다. 이 같은 지방민들의 봉기는 한 해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호족들의 급격한 성장도 문젯거리였다. 중앙 귀족들이 왕위 다툼과 사치 풍조에 빠져 있을 때에, 권력 다툼에서 패한 자들이 지방에 내려가 호족이 되었다. 또, 지방에서 무역 등으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거나 군에서 실력을 키운 이들이 차츰 신라 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립하기 시작했다. 지방 호족들은 신라 정부의 간섭과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들을 지원했다.
스스로의 한계 인정…선택은 ‘하야(下野)’
이처럼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신라를 위해 진성여왕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894년 여왕은 최치원이 건의한 ‘시무 10조’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최치원을 아찬(6등급)으로 등용한다. 아찬은 6두품 신분이던 최치원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등급 관직이었다. 진성여왕으로서는 당시 37살이자 당나라 유학파이면서, 참신한 개혁안을 들고 온 최치원을 과감히 기용한 것이다. 최치원의 시무 10조 내용은 전해오고 있지 않지만, 골품을 초월한 인재 등용과 중앙 집권 강화 등의 내용을 담았을 것이라고 학계는 추정한다.
그러나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노력은 끝내 수포로 돌아간다. 최치원의 시무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기득권층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 진성여왕은 스스로의 한계와 실정(失政)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선택은 ‘하야(下野)’였다.
895년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인 요(제52대 효공왕)를 불러 “경문왕의 후손인 나의 형제자매의 뼈대는 남들과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진실로 헌강왕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면서 태자로 책봉했다. 당시 여왕에게도 아들이 있었으나 자신의 아들을 후계로 고집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뒤인 897년 6월, 여왕은 이제 막 15세가 된 조카 요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이렇게 말했다.
“근년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는데, 이는 내가 부덕한 탓이다. 이제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줄 것이다.” 여왕은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1년(897) 겨울 12월 을사일에 왕이 북궁(北宮)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고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기록에 등장하는 북궁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학계는 터의 구조나 건물 배치 등을 근거로 성동동 ‘전랑지’를 북궁 터로 추정하고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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