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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한 나라 위한 여왕의 포부⋯ 황룡사구층목탑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25호 입력 2026/04/02 13:13 수정 2026/04/02 13:23
경주를 걷다, 신라인을 만나다[3] 선덕여왕과 황룡사구층목탑


 황룡사역사문화관 내 실물의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황룡사구층목탑.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황룡사역사문화관 내 실물의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황룡사구층목탑.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삼국사기’는 황룡사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4년(553)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이라고 하였다.” 진흥왕 14년 새로운 궁궐을 지을 때 용이 한 마리 나타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찰로 고쳐 짓고 이름을 황룡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황룡사는 신라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만큼 그 면적이 불국사의 8배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같은 왕 30년(569)에 담장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35년(574)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조성했다. 진평왕 6년(584)에는 금당(金堂)을 조성했고, 선덕여왕 14년(645)엔 대국통(大國統) 자장(慈藏)의 건의로 9층탑을 건립했다. 553년부터 645년까지 거의 100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를 통해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췄다.
 

경주 황룡사지 목탑터 유구. <사진=국가유산청>확대
경주 황룡사지 목탑터 유구. <사진=국가유산청>


구층목탑 건립 통해 신라 중흥 기원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재위 5년에 궁궐 서쪽의 옥문지(玉門池)라는 곳에서 대규모의 두꺼비들이 몰려서 울어대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여왕이 심상치 않은 징조를 느끼고 옥문지와 이름이 비슷한 국경지대인 ‘옥문곡’에 병사들을 파견하여 확인하게 하니, 과연 백제군이 숨어서 침공을 기회를 엿보고 있어서 선제공격하여 섬멸시켰다고 한다. 이 시리즈 지난 회차에서 언급한 ‘지기삼사’ 두 번째 설화 내용이다.

 

옥문곡 전투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선덕여왕이 두꺼비를 보고 백제의 침공을 예언했다는 내용은 후대에 여왕의 비범한 통찰력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각색된 설화로 보인다. 혹은 선덕여왕이 기묘한 자연현상과 첩보를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여왕의 능력을 의심하는 기득권 세력과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선전술이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처럼 즉위 초기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했던 선덕여왕은 642년 8월 재위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백제가 장군 윤충을 보내 신라의 주요 거점인 대야성(합천)을 함락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전해진 것이었다. 신라에게 대야성을 빼앗겼다는 것은 바로 수도 서라벌까지 침공할 수 있는 길이 백제에 넘어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파견하여 압량주 방어선에서 백제군의 공격을 간신히 저지해낸다. 그러나 이번엔 북쪽의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의 대중국 외교 거점인 당항성을 노리는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이에 다급해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지만, 정작 당 태종은 “여인을 임금으로 삼아 생긴 문제이니, 짐의 종친을 신라의 왕으로 삼겠다”는 모욕적인 제안을 선덕여왕에게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이 같은 굴욕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여왕은 철저하게 국익을 위해 당 태종의 비위를 맞춰가며 외교 협상을 이어갔다. 이에 당나라는 직접적으로 지원군을 파견하진 않았지만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압박하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늦추게 했다.

한숨을 돌린 선덕여왕은 백제를 상대로 반격에 나섰다. 선덕여왕은 백제와의 여러 전투마다 신뢰하던 김유신을 중용했고, 숱한 전공을 세운 김유신은 이후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선덕여왕은 훗날 황룡사장륙존상·천사옥대와 함께 ‘신라삼보’(新羅三寶)의 하나로 꼽혔던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하며 신라의 중흥을 기원했다. 구층목탑은 매 층마다 백제, 고구려, 일본, 중국 등 신라를 둘러싼 주변국들을 상징하며, 이들을 복속시키고 신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선덕여왕의 포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경주 황룡사지 내 삼존불상 지대석. <사진=국가유산청>확대
경주 황룡사지 내 삼존불상 지대석. <사진=국가유산청>


30층 아파트 높이 맞먹는 신라 3대 보물


현재 황룡사 터엔 탑의 주춧돌만 썰렁하게 남았지만, 황룡사구층목탑은 아파트 30층과 맞먹는 높이가 80m에 달했을 정도로 신라에서 가장 높은 목조 건축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탑은 신라의 승려 자장의 건의로 선덕여왕이 645년 세웠다.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고 김용춘이 신라 장인 200명을 인솔하여 완공했

는데, 자장이 중국에서 받은 사리 100알을 나누어 그 일부를 황룡사의 기둥 안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이후 효소왕 7년(698)과 성덕왕 19년(720), 경문왕 11년(871)에 수리를 했고, 고려조에도 여러 차례 중수했다. 이후 1238년(고종 25)에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와 함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고려 때 승려 혜심의 시에 “한 층을 보고나서 또 한 층을 보니 걸음걸음 높이 올라 눈길이 점점 넓어지네”라고 묘사한 부분, 고려 중기 문인 김극기가 ‘황룡사’란 시에서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눈에 트이네”라고 노래한 점 등으로 미뤄 탑은 9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룡사구층목탑 터에 대한 조사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경주고적발굴조사단(지금의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이뤄졌다.

조사 결과 목탑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정방형이며, 기단은 동서 28.8m, 남북 28.9m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단층기단 둘레에 이중으로 지대석(터에 쌓은 돌)을 돌리고 그 사이에 벽돌을 깔았다. 기단 남측 3곳과 북·동·서쪽 각 1곳에선 계단 터도 확인됐다. 탑 중심에 위치한 심초석(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돌) 하부조사에서는 백자로 만든 작은 항아리와 청동 거울, 귀걸이 장식, 팔찌, 구슬 등 다양한 금속유물과 보석이 수습됐다.

이와 함께 사리장엄구(사리함과 사리병을 비롯한 사리를 봉안하는 일체의 장치)도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의 내·외함엔 경문왕 12년과 13년(872~873년) 황룡사 탑을 수리한 경위가 기록돼 있어 큰 주목을 받았다.

훗날 보물 제1870호로 지정된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는 사리내함 판에 쌍구체(雙鉤體)로 음각으로 새겨졌는데, 3매의 판에서 모두 74행 905개의 글자가 판독됐다.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9층 목탑을 창건한 경위, 문성왕에서 경문왕대에 이르는 중수 사실 등이 확인됐다.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 터 인근 1만4000여 ㎡ 부지엔 연면적 2865㎡ 2층 규모로 지어진 황룡사역사문화관이 있다. 황룡사구층목탑은 사라졌지만 당시 웅장했

던 탑의 위용과 선조들의 지혜를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황룡사역사문화관엔 실물의 10분의 1 크기로 만들어진 황룡사구층목탑이 있다. 높이 8m 규모의 재현품이지만 그 위용이 상당하다.

탑 사면 중 북쪽은 각층의 탑 난간과 지붕에 기와를 얹지 않아 관람객들이 목탑의 내부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4만2000개의 나무 부재와 8만5000장의 동기와가 사용됐고, 막새 문양은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기와문양을 새겨 넣었다. 탑의 단면 모형 제작, 구조안정성 검토, 3D 설계단계 등을 거쳐 9층 목탑의 모형을 완성하는데 8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황룡사역사문화관은 크게 구층목탑, 황룡사, 장육존상 등 3가지 테마로 구성돼 있다. ‘3D 영상관’에선 황룡사의 역사를 담은 입체 영상물을 상영한다. 신라시대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사찰로 변경된 황룡사의 태생에서부터 자장 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9층 목탑에 모시는 장면, 몽골 침입 때 사찰이 사라지는 장면 등 황룡사와 구층목탑의 흥망성쇠를 만나볼 수 있다.

이곳에 전시된 장육존상 불두 모형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이 모형은 1982년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청동 나발(불상의 머리카락) 조각을 통해 신라 최대 금동불상이던 장육존상의 크기를 가늠해보고자 진품을 복제해 연구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실제 청동나발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됐다고 한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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