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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화 이정익의 감화정을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25호 입력 2026/04/02 11:58 수정 2026/04/0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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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외동읍 방어리 원골마을 이가산 자락에 여주이씨 감화(甘華) 이정익(李鼎益, 1753~1826)의 구암서당(龜巖書堂)이 있다. 그는 회재 이언적의 8세손으로 후학강학을 위해 1818년경에 서당을 짓고 동쪽 건물에 감화정(甘華亭)이라 편액하였다. 감화정 이름은 “물을 마시는 것이 여러 좋은 음식보다 더 달고, 낡은 옷이 옥을 차고 화려한 것보다 더 빛난다(飮水甘於列鼎 褞袍華於佩玉)”에서 소박함과 검소함의 가치를 담았다.

사후에 손자 이재로(李在潞)가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에게 「행장」을 부탁하였는데 “이정익 공은 자가 중겸(仲謙), 감화는 스스로 지은 호이다. 여주이씨는 향공 진사 이세정(李世貞)에서부터 족보가 시작되었고,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에 이르러 크게 드러났다. 공은 그의 8세손으로, 대대로 경주부 북쪽 양좌촌에 살았고, 4세조 이훈(李塤)에 이르러 부의 동쪽 원동리(院洞里)로 옮겨 살았다. 증조부 이덕존(李德存), 조부 이위중(李衛中) 그리고 부친은 이헌경(李憲經), 모친은 밀성손씨 손경회(孫慶會)의 따님이다. 계유년 12월 14일 원동리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 신묘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으로 몸을 상하게 하여 예를 넘을 정도였다. 상기가 끝난 뒤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와 형의 간곡한 권유로 마지못해 힘써 계속하여 전후로 하과(夏課)에서 장원을 차지한 것이 십여 차례, 향시(鄕試)에 두 번 참가하였으며, 응제(應製)와 복시(覆試)에도 각각 한 번씩 참여하였다. 기미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 상례를 더욱 엄격히 지켰다. 갑자년(1804)에 사마시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늦게 이룬 것을 깊이 한스럽게 여겨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라고 수신과 효행을 몸소 실천하였다.

평소 한가롭고 탁 트인 것을 좋아하여, 말년에 집 뒤 동쪽 산기슭 선영 아래에 구암서사(龜巖書社)를 짓고 살았다. 그곳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었고 장륙(藏六)의 뜻을 담았는데, 장륙은 『잡아함경(雜阿合經)』에 네 다리와 머리, 꼬리를 숨기는 거북이처럼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6식(識)을 단속하는 불교의 수행자 즉, 속세를 떠나 은둔하는 것을 뜻한다. 경주부윤 이덕현(李德鉉)이 그를 불러서 함께 상의하여 향약(鄕約)을 정하였고, 고을의 원로와 선배들의 존중을 받았으며, 서원 모임과 향중 모임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수신하고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으니 도량이 넓고 후덕한 군자였다. 특히 독서를 좋아하여 손수 한서(漢書)와 당시(唐詩), 당송팔가문선 등을 베껴 여러 권의 책으로 만들고, 주서(朱書)에 힘썼고, “두 눈동자를 도우니 다시 소년처럼 긴밤을 환하게 열어주네(重瞳之佐 更少年 開長夜)”라고 남산석으로 만든 수정안경에 대해 예찬하였다.


감화정기 - 감화 이정익


무릇 정자란 사람들이 머물러 모이는 곳이니, 이름을 붙일 때 어찌 그 제목과 품격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 정자의 이름이 아름답다면 아름답다 할 것이나, 이는 내가 말하는 제목을 잘 붙인 것과는 다르다. 대개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마땅히 스스로 지향하는 바를 세우고, 그 뜻을 붙일 만한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름을 짓는 것도 반드시 의리와 뜻에 근거해야지, 단지 사물의 아름다움만을 취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작은 집 몇 칸을 짓고 ‘감화’라 이름하였다. 정자의 남쪽에 옛날부터 ‘부곡(釜谷)’이 있었는데, 그 ‘부곡’이라는 이름이 야인들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니, 혹시라도 ‘감화’라는 이름을 잘못 풀이하지 말 것이다. 무릇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이후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전쟁의 고충이 없었고, 선비들은 편안히 거처하는 즐거움을 있었다. 이는 마치 크게 풍요로운 시대와 같아서, 이른바 “飮水甘於列鼎 褞袍華於佩玉”경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선비들은 참으로 ‘달고도 화려하다(甘且華)’고 할 만하니, 정자의 이름을 여기에서 취한 것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기이한 꽃과 풀을 심은 것도 아니고, 다만 소박한 소나무 울타리와 대나무 문으로 거처를 가렸을 뿐이며, 괴이한 바위나 절경을 갖춘 것도 아니고, 그저 어떤 언덕과 어떤 물가에서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 물을 달다고 여기지 않지만, 스스로는 달다고 여기고, 옷은 몸을 화려하게 하지 못하지만 스스로는 화려하다고 여긴다. 이곳에 살며 도연히 즐기고, 이곳에서 기뻐한다. 이 정자에 올라 길이 맹세하노니 “나의 샘물은 달지만, 그 맛을 아는 이는 참으로 적고, 나의 옷은 남루하지만, 세월이 이미 저무니 누가 그것을 화려하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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