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오씨 괴석(槐石) 오경관(吳慶觀, 1751~?.자 元賓,再賓)은 조선 유학의 계보를 잇고 도통연원을 확인하기 위해서 회재 이언적의 자취를 쫓아 경주를 찾았고, 찬란했던 신라의 유적을 두루 보고 『동유록』을 남겼다.
눌암(訥菴) 박지서(朴旨瑞,1754~1819)의 「종유 제현 유사(從遊諸賢遺事)」를 보면, “고창인 오경관은 죽유(竹牖) 오운(吳澐,1540~1617) 선생의 후손으로, 고령 매호(梅湖)에 살았다.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은거해 수신하였다. 견식이 밝고 통달하였으며, 논의가 엄정하고 곧았기에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였다.” 평가한다. 오운의 부친 오수정(吳守貞)은 이황의 문인으로 유성룡․정구 등과 교유하였고, 말년에 영주에서 저술활동에 전념한 영남남인이다.
오경관은 1789년 39세에 식년시 소과에 합격해 생원에 올랐다. 부친 오광현(吳光顯)은 5형제를 두었는데, 훗날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1739~1812)은 「오우헌기(五友軒記)」에서 “벗이라는 이름은 형제에게서 시작되고, 천리(天理)가 흘러가며, 양심이 본래 자리에서 지켜지는 것이다. … 지금에 나는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다행히 형제가 다섯이 있다. 아!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부모]가 이미 슬픔에 얽혔으니, 효도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지라도, 다섯 사람이 서로 힘을 쓸 수 있는 것이 유독 벗에게 있지 않겠는가.”라고 오경관의 집을 방문해 애틋한 형제애가 담긴 오우헌 기문을 남겼다.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1757~1827)는 최흥원(崔興遠)․정종로․이만운(李萬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동항(李東沆)․최흥벽․정위(鄭煒)․문정유(文正儒) 등과 교유하였다. 오경관보다 앞서 경주를 찾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벗인 오경관의 동유록 서문을 보충해주었다.
이들이 남긴 경주유람기는 회재를 배향한 포항의 학산서원과 의성의 빙계서원 등을 언급하였고, 경주와 의성, 고령의 도통연원 연계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담겨있으니, 회재 이언적 선생이 살았던 경주는 조선의 선비들이 경주를 찾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다.
오재빈 동유록 서(吳再賓東遊錄序) - 현와 윤동야
예전에 나[윤동야]는 동쪽으로 유람을 떠났는데, 옥산서원에서 출발하여 동강(東江)서원을 지나, 연양(延暘)의 바닷가에 이르렀고, 마침내 혁거세의 옛 도읍인 동도에 들어갔다. 그곳의 산천과 인물의 번성을 보고, 첨성대와 월성의 옛 자취를 살피며, 금종과 옥적의 기이함을 구경하였다. 이듬해에는 또 불국사에서 동해로 길을 꺾어 해천지에 이르렀고, 만파정에 묵으면서 「일출가(日出歌)」를 짓고 「채복사(采鰒詞)」를 지어 돌아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득하여 마치 바다의 근원을 다다라 은하수로 오르는 듯하였다. 벗 오재빈[오경관] 역시 동도를 두루 구경하였는데, 그는 곡강의 오서(烏嶼:오도:까마귀섬)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청하의 내연산에서 폭포를 구경하였으며, 돌아서 소주(韶州:의성)의 빙혈에 이르렀다. 돌아와서는 유람한 일을 한 폭의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내게 보여 주며 그 견문을 자랑하였다. 나 또한 내가 본 것으로 답하였는데, 그가 미치지 못한 곳은 내가 보탰고, 내가 미치지 못한 곳은 그가 보탰다. 동도의 동남쪽은 오재빈이 나만 못하고, 서북쪽은 내가 오재빈만 못하였으나 관람하고 느낀 바에 있어서는 서로 같았다.
동도는 옛 신라가 삼씨(三氏:박,석,김)가 천 년 동안 도읍을 정한 땅이다. 본조에 이르러서는 추로(鄒魯)에 비길 만큼 인문이 중시되는 곳이 된 것이 어찌 산수만 아름다워서이겠는가. 만약 신라에 각간 김유신, 박제상, 아찬 최치원, 홍유후 설총 같은 여러 인물이 없었고, 본조에 회재 선생이 없었다면, 그저 동쪽의 바다와 산에 그쳤을 뿐이니, 어찌 동도라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빼어난 기운이 모여 난 것은 인물이 땅의 영기(靈氣)에 힘입은 것이지만, 황무지를 개척한 공으로 말하자면 땅의 영기 또한 인물의 힘을 빌린 것이다. 나와 오재빈이 반드시 먼저 옥산·동강(東崗)·검굴(釰窟)·간묘(諫墓) 아래를 거쳐 포항의 학산서원과 의성의 빙계서원에 이르러 배회한 까닭도 모두 여기에 있다.



홈
오피니언
연재
오상욱의 조선스토리



